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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항일운동 방동화

성명
방동화 (房東華)
본관(출신)
남양
생존기간
1887 ~ 1970
인물상세정보
무오(戊午) 중문면 법정사의 항일 운동. 봉기군의 좌대장(左大將). 스님. 일명 방하룡(房河龍), 본관은 남양, 방우필(房佑弼)의 아들로 산남 중문면 대포(大浦)리 371번지에서 태어났다. 1897년부터 10년 동안에 걸쳐 중문면 하원(河源)리의 훈장 김성균(金聖均)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본시 불교에 뜻을 두어 1913년 4월 초파일에 경북 경주군 기림사(祇林寺)에서 득도(得度), 이어 경북 문경군 대승사(大乘寺)에서 김혜옹(金慧翁) 스님으로부터 사미과(沙彌科) 초등과를 수업하였고, 1915년 기림사에서 사미계를 받았다. 1914년 제주도로 들어온 김연일은 중문면에 있는 법정사(法井寺)의 주지로 있으면서 항상 교도들에게 항일 사상을 고취하고 있었다. 1918년 당시 법정사에는 김연일(金蓮日), 정구용(鄭九龍), 장임호(張林虎) 등 7명이 입도, 법정사에 체재하고, 또 제주 출신 승려 강창규(姜昌奎)와 방동화(房東華)가 함께 하면서 한층 세력이 강화되었다. 이들은 동년 6월경 산북 산천단(山川壇)에서 항일 거사 성취를 위한 백일 기도에 들어갔다. 동년 8월 방동화는 선도교(仙道敎) 수령 박명수(朴明洙:일명 주석)를 찾아가 찬성을 얻으면서 선도교 세력을 운동에 합류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선도교는 1922년에 이르러 보천교(普天敎)로 개칭된 종교로써 도내에 세칭 2만여 명이란 교도를 가진 민족 종교였다. 김연일과 함께 하는 항일 세력은 1918년 9월 19일(음 8월 15일) 법정사에서 행하여지는 불교 의식인 우란분제(盂蘭盆祭)에 참석한 남녀 교도 30여 명에게 저항 의지를 밝혔다. 일제 축출과 국권 회복이란 양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일본 상인들을 몰아낸다는 구체적인 방침을 설정하여 제시했다. 서귀면과 중문면의 이장(里長)은 장정을 모아 10월 7일 하원(河源) 마을에 집합하라는 통보를 내리고 '10월 8일 제주 성안을 공격하여 관리를 체포하고 일본인을 추방하되 이 명령을 위반하는 경우에는 군법에 처한다.'는 격문을 돌렸다. 동 10월 5일 장정 33명을 법정사에 소집시켜 군대 조직으로 편성한 후 김연일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선포하고 박명수를 도대장(都大將), 방동화와 강민수를 좌ㆍ우대장, 또 양남구(梁南球)를 중구대장, 김삼만(金三萬)을 후군대장으로, 장임호를 모사(謀師)로 삼았다. 김연일은 박명수와 실행 방안을 논의하여 우선 서귀포와 중문리를 공격한 뒤 제주 성내로 진입하기로 정했다. 인원 동원 방법은, 봉기군이 지나가는 연도(沿道)의 각 마을 이장으로부터 민적부를 제출받기로 하였다. 동 10월 7일 새벽 김연일, 김인수(金仁秀), 김용충(金用忠) 등은 법정사에 머물고, 법정사에 집결한 봉기군은 서귀포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먼저 도순(道順)리 상동에서 5명 정도를 설득시켜 봉기군에 가담시켰으며 이어 영남(瀛南)리에서 이장 강임준에게 민적부(民籍簿)를 제출하도록 하여 25명의 장정을 징발, 또 강정리에서 30여 명을, 그리고 서호(西好), 호근(好近)리에서도 가담자를 확보하였다. 이 때 선봉에 있던 강창규는 봉기군에 명령하여 전주(電柱) 2본을 절단함으로써 제주 성내와의 통신을 차단해 버렸다. 하원리에 이르니 봉기군은 3~4백 명에 이르러 먼저 중문 경찰관주재소를 무차별 파괴하고 전소시켜 주재소장 요시하라(吉原)를 비롯 경관 3명을 포박하여 응징하였다. 또 외래 사상의 배격이란 차원에서 길 가던 개신교 신자와 윤식명(尹植明) 목사와 전도사 원용혁(元容赫) 등을 폭행하여 서귀포 고이즈미(小泉淸身)병원에 입원하게 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은 목포에 증원을 요구하게 되고 한편, 도내 각처에서 모여온 진압대에 의해 서호리에서 대치하던 박명수 부대는 퇴각하고 결국 38명의 봉기 주동자 전부가 체포당하였다. 이러한 항쟁으로 검거된 총인원은 66명으로 대부분 불교도와 선교도들로서, 의병 항쟁 이후 3ㆍ1 운동 이전에 국내에 일어난 여러 무력 투쟁 중 대규모라는 성격을 갖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일제는 민족 종교인 선도교를 사교 집단으로 매도 격하시켰으며 이 운동을 가혹하게 대처해 나갔다. 관련자 66명을 3차에 걸쳐서 목포검사국으로 송치하였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재판이 1919년 2월 4일 광주지법(光州支法) 목포지청에서 열려 31명에 대하여서는 실형이 언도되고 2명은 재판 직전에 심한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또 15명에게는 벌금형이 내려지고, 나머지 18명은 불기소 처분을 선고하여 석방되었다. 그는 1919년 2월 광주 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법(搔擾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소위 칙령(勅令) 제120호 제6조에 의하여 3년 감형이란 소위 특전(特典)을 받을 수 있었다. 1925년 경남 범어사(梵魚寺)에서 비구계를 받고 1927년 4월부터 1938년 7월까지 마하연(摩荷衍) 선원에서 수선안거를 성취, 법랍 6세로 성만(成滿)하였다. 이듬해 기림사의 주지로부터 도첩(度諜)을 받고, 도내의 각지 불교 포교당 15개소의 사암(寺庵)은 중ㆍ일 전쟁 발발후 일본의 국방 헌금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중문면 하원리 원만암의 방동화도 함께 따랐다. 특히, 일제 당국은 한국 불교를 일본화(日本化)하여 전쟁 수행의 목적에 이용하려는 속셈이 서서히 나타났다. 1939년 4월 2일 제주도(濟州島)경찰서의 지시로 도내(島內) 각 사찰 실무자 2명씩을 소집, 제주도 불교연맹을 결성하여 집행 위원장에 오이화(吳利化) 스님이 선임되고 방동화는 감사위원 5명이 지명될 때 함께 뽑히자 이를 수락했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식민지 정책은 더욱 가혹해지던 1941년에 기림사(祇林寺) 포교소의 포교사로 취임하였다. 1945년 조국이 해방되어 12월 2일부터 이틀 간에 걸쳐 "조선 불교 혁신 전국 승려대회"가 제주시내 대각사(大覺寺)에서 개최, 오이화 의장으로부터 교무원장에 방동화 스님을 추천하자 이일선(李一鮮) 위원장의 동의로 추대되니 취임하였다. 1970년 12월 28일 서귀포시 회수(廻水)리 856번지에서 사망하였으며 정부에서는 고인이 독립 운동에 헌신한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자료출처 : 김찬흡 (북제주문화원 원장)
기타

 

담당부서
문화체육대외협력국 문화정책과
담당자
고혜정
연락처
064-710-3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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