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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항일운동 부생종

성명
부생종 (夫生鍾)
본관(출신)
제주
생존기간
1909 ~ 1936
인물상세정보
함덕 독서회와 청년동맹 및 함덕리의 추도비 건립과 또 "제주도 혁명적 농민조합 준비위원회"의 항일활동. 자는 화종(華鍾), 호는 설파(雪波) 본관은 제주, 부만천(夫萬千)과 어머니 김완희(金 完熙)의 4남 4녀중 장남으로 조천읍 함덕(咸德)리 3131번지에서 태어났다. 1928년 3월 조천 공립보통학교를 졸업,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ㆍ오사카 등지에서 노동을 하면서 열악한 노동 조건과 저임금으로 민족 차별이 심한데 대하여 민족주의적인 저항 의식이 유발되었다. 귀향 후 해산물 장사를 하면서 제주 청년동맹 함덕지부에 가입하여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1월 제주도에서 김일준(金日準)과 함께 죽은 동지를 애도하는 기념비를 건립하려다가 비문 내용에 독립 사상이 들어있다 하여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31년 12월 8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 유예 5년을 언도받았다. 그는 1933년 2월에 김일준과 함께 독립 운동을 목적으로 향동회(鄕同會)와 민풍(民風)진흥회를 조직하였으며 또 동년 4월 혁명적 함덕농민조합협의회를 결성하여 책임자는 김일준(金日準)을, 농민부는 김원근(金元根)을, 그는 조직선전부를 맡아 활동을 강화하였다. 1930년대 초반 농업 공황과 더불어 농촌의 피폐가 극에 달하여 농조(農組) 운동이 활발하였다. 육지부 타지에서 합법적인 농조 문제로 소작쟁의(小作爭議)나 수리조합 문제 등에 관심을 두었으나 제주의 합법적인 농조 운동은 농촌 개량과 증산을 통한 어용농조(御用農組)로 변질되어 일제의 착취를 돕는 경우로 전락되었다. 이에 제주 지역에서는 과거의 운동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혁명적 농조 운동에 대한 모색이 이루어졌다. 이를 주도한 활동가는 김두경(金斗璟)과 전협계(全協系), 강팽학(康彭鶴) 등이었다. 김두경은 이 지방 활동가들과 함께 1933년 1월 "제주도 적농(赤農) 준비위원회"를 정하여 부병훈(夫秉勳)을 책임자로 지명하였다. 적농 준비 조직인 농민 위원회가 1932년 10월 중순에 김경봉(金京奉), 양병시(梁秉時), 장한호(張漢鎬) 등에 의해 조직되었다. 1934년 7월 적색(赤色) 노농 연구회로 개조, 이어 "신좌면 농업조합 준비위원회" 등으로 조직 확대 되었다. 이 일로 62명이 구속되었다. 일제는 "적색 농업조합사건"이라 불리어졌으나 우리의 역사 기술로 "혁명적 농조 운동"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이들 부생종, 김일준, 부병준, 김원근 등은 1933년 2월 하순에 함께 모여서 과거의 운동을 비판한 뒤, 농민 대중을 본위로 하는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혁명적 농민조합의 건설에 나서기로 하고, 그 하부 조직으로서, "신좌 혁명적 농민조합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준비위원회의 책임자는 김일준으로 하고, 담당 구역을 분담하기로 하였다. 즉, 김일준은 신촌ㆍ조천ㆍ함덕ㆍ신흥리를, 부생종은 선흘ㆍ와흘ㆍ교래ㆍ대흥리를, 부병준은 북촌ㆍ구좌면 동복ㆍ김녕ㆍ월정리를 맡았다. 이들은 1933년 3월 상순에 다시 모였는데, 이 자리에서는 준비위원회의 운동 방침이 정하여졌다. "신좌 혁명적 농민조합 준비위원회"가 결성된 뒤, 각 지역별로 조직의 확대가 이루어졌다. 먼저 함덕리에서는 1933년 3월 중순 "함덕리 혁명적 농민조합 협의회"가 따로 조직되었다. 김일준은 1933년 2월에 신촌리 이기표를 만나서 운동에 농민조합 조직을 준비하도록 하고, 그를 신촌리 책임자로 지정하였다. 이에 따라서 이기표는 1933년 4월 중순 김삼룡, 홍형표, 강공림, 홍순하 등과 함께 농민조합 조직의 준비 단체로서 "일요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부병준은 구좌면 월정리의 신창진을 동지로 확보하여, 그로 하여금 월정ㆍ김녕ㆍ동복리 책임자를 맡게 하였다. "신좌 농민조합 준비위원회"는 농어민 대중을 농민조합 운동에 동참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활동을 벌여나갔다. 먼저 1933년 7월에 김일준, 부생종, 김원근 세 사람이 모여서 어민 획득 방안으로서, 그들이 속해 있는 함덕리 산업조합 사업의 일환으로 해안에 등대를 설치하여 야간 항해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또한 7월 하순에는 신좌면장 한보권(韓保權)의 부정 행위에 대한 폭로 운동과 더불어 임야세ㆍ축산조합비ㆍ농회비 등 관제 조합비 거부 운동을 벌임으로써 농민 대중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신좌 농민조합을 결성하기 위한 하부조직의 결성은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1933년 10월 상순 그는 김일준, 부병준 등과 함께 앞으로는 준비위원만의 모임으로 그치지 말고 각 마을별로 하부 조직의 결성에 노력하도록 협의하였다. 이에 따라서 김일준은 1934년 4월 상순 김두성과 김태근을 만나서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김두성은 그뒤 함덕리 여자청년회에 참석하여 부인의 의식화에 주력하였고, 함덕리 축구회를 조직시켜 대중 포섭에 노력하기도 하였다. 한편 김원근은 부생종과 만나서, 유력한 농민을 선택하여 "근농회"를 조직하여 면화 또는 고구마를 공동 경작함으로써 농민을 포섭하고자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1934년 8월에 혁명적 농민조합 창립운동으로 동지들과 일경에 체포되어 목포로 압송, 1936년 6월 초순 공판(公判)에 회부되었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마침내 급성 대장염으로 동년 6월 29일 오전 8시 50분 목포형무소에서 옥사, 동 7월 1일 부친 부만천(夫萬千)은 피눈물을 머금고 동 형무소에 찾아가 장한 아들의 유해를 찾아 대서환(大西丸) 편으로 운구 귀환하여 장사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을, 또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자료출처 : 김찬흡 (북제주문화원 원장)
기타

 

담당부서
문화체육대외협력국 문화정책과
담당자
고혜정
연락처
064-710-3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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