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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항일운동 홍경옥

성명
홍경옥 (洪卿玉)
본관(출신)
남양(南陽)
생존기간
1912 ~ 1949
인물상세정보
협재리 독서회 활동과 "제주도 혁명적 농민조합 창립 준비위원회"의 항일 활동. 일본식 성명은 도쿠야마(德山精一).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홍영종(洪榮鍾)의 장남으로 한림읍 협재(挾才)리 1902번지에서 태어났다. 1927년 3월 한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여 동교의 보습과(補習科)를 거쳐 약 1년 간 부산(釜山)상업실천학교에 다녔다. 초등학교 재학시 협재소년회에 가입, 월간지 「어린이」를 탐독하여 민족 의식을 배양, 또 동회의 부단장으로 선임되자 항일 민족의식을 마을 소년들에게 고취시켰다. 그는 1929년 3월 용수(龍水)리 개량서당 교사로 취직하여 동년 연말까지 재임하였다. 1930년 동향의 윤한진(尹漢珍)의 지도로 동지 장병윤(張炳允), 강공흡(姜公洽), 고창순(昌淳), 장정호(張禎鎬), 김이규(金二奎), 김승옥(金昇玉) 등과 회합하면서, 자본주의 사회 제도를 변혁하여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면 일제는 패망한다고 믿어 독서회를 조직, 동지를 규합하여 세력을 확산하였다. 동년 3월 하순 홍경옥, 장병윤(張炳允) 등은 윤한진의 집에서 동지들과 함께 교재 「자본주의 흑막」, 「노동 계급의 경제학」 등을 읽고 토론으로 이어졌다. 1931년 5월 5일 일어난 한림공립보통학교 맹휴(盟休)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받아 이익우(李益雨), 최복렬(崔福烈), 윤한진(尹漢珍) 등 4명과 함께 구속당하기도 하였다. 이 맹휴는 학동 김정맹(金精孟), 홍창주(洪昌柱) 등이 학교장에게 첫째 노예 교육 폐지, 둘째 교과서 무상 배포, 셋째 김(金) 선생 축출 등을 요구하며 재학생 400명이 1일 간 동맹휴학을 결행하게 한 항일 학생 운동이다. 또 동지 장용진(張溶珍)이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검거되어 활동이 미미하더니 1932년 5월 9일 장용진이 석방되어 귀향하자 환영회를 개최하면서 세력을 규합, 조직을 재건하게 되었다. 1933년 1월경 "제주도 혁명적농민조합 창립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자 한림면의 농민위원회는 조직을 확대 강화하는데 주력, 이를 주도한 분은 김경봉(金京奉), 양병시(梁秉時)였다. 협재리의 운동을 이끌고 있던 홍경옥은 1934년 2월 김경봉으로부터 지시를 받아 조직체를 결성할 것을 결심했다. 1934년 2월 하순 장병윤, 강공흡 등과 회합, 동지규합에 힘썼다. 협재리의 운동가들은 1934년 7월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홍경옥을 책임자로 하고 농민부에 홍경옥, 재정부에 장용진, 가두부에 장병윤, 소년부에 강공흡을 각각 담당자로 정하였다. 농민부는 이민회, 민풍진흥회에 잠입하여 농민의 신임을 얻도록 노력할 것, 재정부는 운동 자금 및 연구 서적 구입 대금 융통에 노력할 것, 가두부는 야구 및 축구회를 개최하여 실업 청년들을 참가시켜 이들에게 의식을 고취하는데 노력할 것 등이었다. 이러한 운동 방침에 따라서 곧바로 협재리 무명 결사는 1934년 8월 초순부터 약 1개월간 재암천 부근 모래밭에서 야구 운동을 개시하여 청소년들을 참가시켜 운동가를 양성하였다. 그러나 협재리 무명 결사의 운동은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하였다. 1934년 8월 하순 결사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운동가들은 각 부문별로 활동의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들은 침체된 운동의 발전책을 모색하였다. 먼저 농민부는 농민 대중이 우리와 반목하고 있는데 대하여 환심을 얻도록 태도를 고칠 것, 재정부는 동지 자체의 생산 기관을 가질 것, 가두부 및 소년부는 운동 기구를 수선하여 축구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하여 동지를 획득하도록 할 것을 협의 결정하였다. 즉, 1933년 1월 항일 운동의 투쟁의식을 강조하기 위해 윤독회를 조직하여 그 책임자가 되고 동년 9월 명월(明月) 소재 구우(舊右)공립보통학교의 한림리 이전 계획에 대한 반대 운동을 전개, 이는 무산 대중의 과중한 재정 부담이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1934년 7월 자택에서 장용진 등과 함께 무명의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전책임과 농민부ㆍ가두부(街頭部)를 담당, 운동 방침을 정하고 동지 규합에 힘썼다. 한편 동년 10월경 제주도청 산림주사보 박치룡(朴致龍) 및 한림면 주재 농회 지도원 채여옥(蔡如玉)이 협재리에 출장 나와 사방림(砂防林) 설치 예정지의 토지 소유자에 대하여 양해 사항에 날인하게 하자 홍경옥은 토지 소유자 7, 8명에게 이의 부당성을 성토하면서 항일 의식을 북돋우었다. 이무렵 김경봉(金京奉)의 지도로 제주도 혁명적농민조합 창립준비위의 활동에 앞장서다가 일경(日警)에 체포되었다. 1930년대 초반 농업 공황과 더불어 농촌의 피폐가 극에 달하여 농조(農組) 운동이 활발하였다. 육지부 타지에서 합법적인 농조 문제로 소작쟁의(小作爭議)나 수리조합 문제 등에 관심을 두었으나 제주의 합법적인 농조 운동은 농촌 개량과 증산을 통한 어용농조(御用農組)로 변질되어 일제의 착취를 돕는 경우로 전락되었다. 이에 이르자 제주 지역에서는 과거의 운동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혁명적 농조 운동에 대한 모색이 이루어졌다. 이를 주도한 활동가는 김두경(金斗璟)과 전협계(全協系), 강팽학(康彭鶴) 등이었다. 김두경은 이 지방 활동가들과 함께 1933년 1월 "제주도 적농(赤農) 준비위원회"를 정하여 부병훈(夫秉勳)을 책임자로 지명하였다. 적농 준비 조직인 농민위원회가 1932년 10월 중순에 김경봉(金京奉), 양병시(梁秉時), 장한호(張漢鎬) 등에 의해 조직되었다. 1934년 7월 적색(赤色) 노농 연구회로 개조, 이어 "신조면 농업조합 준비위원회" 등으로 조직 확대 되었다. 이 일로 62명이 구속되고서 일제는 "적색 농업조합 사건"이라 불리어졌으나 우리 역사 기술로는 "혁명적 농조 운동"으로 자리매김되었다. 혁명적 농민조합 운동으로 16명은 목포로 이송되어 1937년 4월 12일에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재판이 종결되었다. 이 때 징역 2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43년 4월 경상북도 영일군(迎日郡) 구룡포(九龍浦)로 생활근거지를 옮겨 그곳에서 살더니 1949년 11월 15일 구룡포리 297번지에서 병사하였다. 이 때 같은 마을의 동지 강공흡, 장병윤, 장용진 등은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은 바 있다. 사실은 협재리 독서회 활동의 리더는 홍경옥이고, 혁명적 농민운동의 핵심적 책임자는 김경봉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74주년 기념일에 즈음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자료출처 : 김찬흡 (북제주문화원 원장)
기타

 

담당부서
문화체육대외협력국 문화정책과
담당자
고혜정
연락처
064-710-3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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