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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마을약사

마을약사

설촌역사

마을에 관한 설촌유래는 마을의 생성과정의 역사적 근원을 파악하고 마을 전체가 역사적으로 처해 왔던 환경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이의를 갖는다. 또한 한 지역의 역사를 통하여 한 나라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조망함으로써 역사의식을 고양하는데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고성리는 고려시대 삼별초군이 몽고에 항거하여 처절한 최후를 마치며 자주독립정신의 숭고한 민족혼의 얼을 남긴 역사 현장의 고장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역사의 현장에 관한 기록이나 유적은 매우 미미한 형편이고 다만, 몇몇 역사 기록의 단편들이거나 구전 및 전설로 남긴 자료들 뿐이므로 고증적 기록을 중심으로 설촌 역사를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항파두리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고 또 언제부터 마을 형태가 형성되어 행정구역상 기초단위인 리(마을)단위로 편제되었으며 항파두리의 명칭의 유래가 어떤가를 밝힌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더욱이 金通精(김통정) 장군이 항파두리에 성을 쌓고 사람을 살게한 후 700여년이 흐른 것을 감안하고 設村(설촌)이래 마을 역사를 증빙할 수 있는 기록들을 보관하거나 고증할 수 있는 고적들조차 전무한 것을 생각한다면 설촌 초기의 역사를 파악하기란 至難(지난)한 일이다.

그러나 몇 백년만에 처음으로 마을의 역사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고증이나 기록을 중심으로 기술하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가능한 모든 방법들을 총 동원하여 기록적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래서 이미 밝혀진 고문서에 나타난 역사기록들 이외의 고성리 설촌 유래에 관한 기록의 자료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설촌역사가 약 400년(1600년초)이라는 구전설을 반증하여 그 이전에 설촌되었음을 고증하는 자료와 기타 상귀리와의 합촌·분향 관계에 관한 정설을 뒷받침 하는 기록적 증거를 찾으려고 애를 썼다.

1992년 7월부터 1993년 1월까지 문헌상의 기록과 고성리 및 근접 마을에 보관해 온 공·사적인 기록인 마을 지동궤나 개인이 소장한 문서 및 족보를 수회에 걸쳐 조사하였고 오래전부터 발견되는 유물과 유적은 물론 옛날부터 구전하여 내려온 사실들을 최대한 탐문하였다. 그러나 설촌유래에 관한 고증적 기록은 족보에 나타난 것뿐이고 거의 구전과 추측에 의거할 뿐이므로 기록과 구전의 내용을 비교하면서 설촌역사를 기술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을에 관한 설촌내역을 밝히고자 하면 제주도 전체의 행정적 변천과정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먼저 제주도의 행정적인 변천과정을 살피고 고성리의 설촌유래 및 항파두리의 명칭유래를 기록 중심과 구전에 의한 역사를 정리하여 밝혀야 한다. 여기 고증적 기록에 의한 설촌역사는 조선초에 나타난 고성리에 관련된 문헌상의 기록을 중심으로 현존하는 사실들과 관련하여 설명하였다.

고성리는 한 나라의 역사적 유적지이기 때문에 사적 기록을 중요시하여 설촌역사를 정립하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설촌유래는 그 사적 기록과는 별도로 사실에 근거하여 형성되고 구전에 의하여 오랜세월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전하여 내려 올 수도 있으므로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음으로 앞으로 계속하여 연구과제로 남는다.

설촌 유래

고성리(항파두리)에 처음 사람이 거주한 것은 언제부터이고 마을 형태가 갖추어진 것은 언제이며 행정구역상 리단위로 승격된 시기가 언제부터라는 것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삼별초가 항파두리에 내외성을 축성할 당시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근거는 기록상 확실하다. 즉 고려 원종 12년이 1271에 김통정 장군이 여몽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하여 항파두리 토성을 쌓기 시작한 때부터 사람은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문헌상에 나타난 기록에 의한 추측과 지금까지 구전으로 내려오는 유래를 비교하면서 살펴보자.

(1) 缸坡頭珹(항파두성)과 관련한 문헌상의 유래

고려 원종 12년에 삼별초의 김통정 장군이 제주도에 도착하여 지형·지물을 관찰한 끝에 주위가 하천과 언덕으로 둘러 싸여 있고 바다가 눈 앞에 확 트여 있어서 적을 발견하고 방비하는데 매우 적합한 천연적인 요새지인 고성리 항파두리에 근거지를 정하고 내외 이중으로 된 성을 축성하여 마지막으로 여몽연합군의 침입공격에 대비하였다.

고려조에 있어서 항파두리는 최후의 대몽항쟁지로서 주요한 지역이었다. 이런 지역에 石城(석성), 外成(외성)의 내외성을 견고하게 축성하자면 오랜 시일과 노력을 제공하는 인원이 매우 많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내외성을 축성하는 주위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여러 가지 시설등이 설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성을 위해서도 많은 사람이 상주하게 되어 자연히 촌락이 형성되었을 것이고 그 축성하는 인원들로 이루어진 촌락을 중심으로 하여 또 그 주위에 인접하는 곳곳에 조그마한 촌락들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조그마한 촌락들이 고성리를 설촌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면 항파촌 또는 항파두고성으로 나타나 있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문헌상의 기록을 보면 「고려사 세가 원종 13년 을묘조」의 서쪽 사십리에 있다. 성안에 샘이 있어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고려 원종 12년에 김방경을 보내어 진도에서 삼별초를 쳐서 이를 파괴하자 김통정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귀일촌 항파두리에 웅거하고 이 성을 쌓아서 막았다. 방경의 무리가 나아가 쳐서 함락시키고 천호 윤방보를 시켜 원나라 군사 400명과 관군 1,000인을 거느려 머물러 진수하게 하고 돌아왔다」로 표기하고 있다.

곧 진도에서 패한 김통정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와서 위일촌 항파두리에 웅거하고 이 성을 쌓아서 방어했다고 하며, 성안에는 샘이 있어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아니했다고 한다. 이 성은 내성으로서 성의 규모는 둘레 700m 정도의 정방형의 石城(석성)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건물이 있었던 성안에는 기와 조각과 가공된 석재가 무수히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더욱이 여기서 습득된 기와조각 중에는 당초무늬가 새겨져 있는 軒平瓦(헌평와) 조각과 「高內村(고내촌)......辛丑二月(신축이월)......」이라고 명문된 조각들이 있어 주목을 끈다. 『辛丑年(신축년)』은 고종 28년(1241년)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이때에 만들어진 기와가 약 30년 후의 삼별초의 관부건축에 쓰여졌던 것인지 의문이 생기며 『고내촌』이라 한 것도 기와가 만들어진 고장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갖게된다.

또 성내의 이곳저곳에는 색상이 선명한 고려청자의 파편도 산재해 있었으며 거대한 초석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는가 하면 불상도 출토한 바 있어서 삼별초 당시의 이모저모를 상상케 한다. 그리고 철대문의 돌쩌귀, 구리쇠로된 기둥, 주춧돌, 각종 생화용기 등의 흔적들이 여기 저기에서 발견되는 것이 오래전부터의 일이라는 것을 고성리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알고 있다.

이와 같은 유적과 유물들이 700여년이나 지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는 것은 삼별초가 패하고 내성이 함락되어 폐허가 된 후에도 사람이 어느 시기까지는 살아 왔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리고 「新增東國餘地勝(신증동국여지승람) 〈濟州牧(제주목) 古跡條(고적조)〉-항파두고성」에 나타난 귀일촌은 상·하귀리인 듯 하며 항파두고성은 삼별촌의 내성임을 분명히 밝히는 견해(김상기, 고려시대사)도 있으나 외성으로 생각되는 것이 고토성이다.

고토성에 관하여 나타낸 문헌기록으로는 「新增東國餘地勝(신증동국여지승람) 제 38권 濟州牧(제주목) 古跡條(고적조)-古土成(고토성)」에 『在西南三十六里(재서남삼십칠리) 周十五里(주십오리) 三別 秒所築(삼별초소측) 今皆 廢(금개 폐)』(주 서남쪽 36리에 있는데, 둘레가 15리이다. 삼별초가 쌓은 것인데 지금은 모두 허물어 졌다)고 되어 있다. 또 고성으로 기록된 것으로는 위의 같은 문헌의 「古跡條(고적조)-古成(고성)」에 『州成西北(주성서북) 有古成遺址(유고성유지)』(주 성 서북쪽에 고성의 남은 터가 있다.)라고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古土成(고토성), 古城(고성)으로 표시한 문헌기록으로는 「耽羅志(탐라지)」, 「南宦博物(남환박물)」, 「濟州郡邑誌(제주군읍지)」 등에도 위와 같은 내용이 보인다.

항파두성에 관해서는 위와 같이 여러 가지 문헌속에 기술하고 있는데 다만 위에서 古城(고성)으로 표기한 것이 꼭 外城(외성)으로 보는 古土城(고토성)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內·外城(내·외성) 전체를 뜻하는지도 모른다. 기록에는 외성의 주위가 15리에 달했다고 했으며 현재 성벽이 많이 허물어지고 흔적이 거의 없어졌으나 1960년대만 하여도 대체로 원형에 가까운 높이로 보존된 것을 몇 군데서 볼 수 있었다.

그 절단된 면을 보면 토층과 석괴층을 교대로하여 십수층을 쌓은 형적이 있어서 매우 견고하게 축조한 수법을 엿볼 수 있다. 또 제주도에 현존하는 유일한 토성이라는 점과 규모면에서 가장 크다는 점이 주목된다. 더욱이 이 토성은 언덕과 하천을 따라 축성되어 있으며 성위에는 말을 달릴 수 있도록 넓은 도로를 만들어 두었고 그 도로위에 항상 나무를 태운 재를 뿌려 놓았다가 적이 침공할 때 연막전술을 폈다고 한다.

즉 말 꼬리에 대나무 빗자루를 달아 그 재를 밟고 빠르게 달리면 재가 하늘과 사방에 흩날려서 온 천지가 캄캄하여 앞뒤를 분간할 수 없게 하는 연막전술을 써서 적을 방어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은 구전으로도 그 당시 상황을 연상시키면서 계속하여 내려오고 있다. 이 외성의 면적은 약 24만평에 달한다고 하였으며 동·서·남·북에 4개 문이 있고 성내에는 백성들이 많이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2) 고지도상에 나타난 유래

고지도상에 나타난 설촌에 관한 기록을 참작하여 보기로 한다. 먼저 조선 숙종 28년 壬午年(임오년)(1702년)에 작성한 「眈羅巡歷圖(탐라순력도)」 가운데 「한라장촉」의 지도에 보면 지금의 항파두리성이 있는 곳은 토성으로 표시되어 있고 그 밑에 고성이라고만 기술되어 있다.

그 토성 밑에는 광령이 표시되어 있고 토성 위쪽에는 有信洞(유신통)과 今勿德(금물덕)이 표시된 것이 보여 고성은 그 당시부터 사람이 살았던 마을의 명칭으로 파악된다. 「眈羅巡歷圖(탐라순력도)」는 제주도의 방어와 군민, 풍속등을 살피면서 순력하는 장면의 그림과 설명을 주로 하고 있는 지도이며 감귤, 목장, 산천 등에 관한 것도 「한라장촉」에 표시하고 있기 때문에 제주도와 주변 도서의 지도가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또 제주도에 관한 전도의 실상을 자세하게 밝혀 주는 최고의 지도인 1709년에 제작한 규장각과 제주도 소장본인 「眈羅地圖倂書(탐라지도병서)」를 보면 고성리의 항파두성 자리를 『항파촌』으로 표시하고 있다. 규장각 소장본으로 18세기 전반에 작성한 「海東地圖(해동지도)」의 호남편의 제주도 지도에는 항파두성이라고 부르는 곳이 토성이라고 표시 되었으며 그 밑에 『항파촌』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또 18세기 에 만들어진 저자미상의 「濟州三縣圖(제주삼현도)」의 고지도에도 『항파촌』으로 표시하고 있다. 다만 여기서는 항파두성을 토성이라고 표시하지 않고 삼별초소국고성으로 표기한 것이 차이점이다. 여기서 부언해 둘 것은 상·하귀일리가 「海東地圖(해동지도)」에는 귀일리로 표시될 뿐이지만「濟州三縣圖(제주삼현도)」에서는 상귀일리·하귀일리로 표시되어 있어서 먼저 귀일계에서 귀일리로 되었다가 상귀일리, 하귀일리로 분리된 다음 또 다시 어느 시기에 와서 상귀리, 하귀리로 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저자미상의 「濟州三邑地圖(제주삼읍지도)(奎章閣(규장각) 所藏(소장))」에는 현존하는 항파두성을 金通精所築城(김통정소축성)으로 표시하고 있으며 그 밑에 『항파촌』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밑에 상귀일리가 표시되어 있고 김통정소축성의 동쪽에는 광령촌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남쪽에는 유수암촌과 충덕촌(유수암촌의 약간 서쪽)이 표기 되고 있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3) 고성리 명칭으로 표기된 문헌상의 유래

다음으로는 지금의 명칭인 고성리로 표기된 문헌상의 기록을 찾아보면 앞에 기술했지만 1780년대에 간행한 「제주읍지」에 애월면으로 하여 고성리를 표시하고 있다. 즉 『新右面 古城里 西距南二十六里 民戶二十七 男四十九 女九十四 』로 쓰여 있는데 그 내용은 『신우면 고성리는 제주목에서 서남쪽에 있는데 그 거리는 26리이며 민호는 27호 있고 남자는 49명, 여자는 94명이 된다』는 뜻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보와 같이 고려조에 항파두성을 축성한 후에 촌락을 이루어서 사람이 살아오면서 『고성』 또는 『항파촌』으로 부르면서 내려오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어느시기에 고성리로 명명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다.

보통 리는 25시 이상일 때에 붙여지고 그 미만일 때에는 촌으로 부르는데 위에서 보듯이 「제주읍지」가 발간되는 1780년대에 이르러 고성리가 행정구역상의 명칭으로 인정 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고토성, 고성, 항파두리성 등으로 부르다가 항파촌으로 변경해서 호칭되고 25시 이상이 되자 고성리로 승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독립된 리단위로 되기전에는 귀일촌의 한 조그마한 촌락으로 항파두리성 축조당시부터 존재하여 오다가 항파두리성이 함락되었을 때 거의 폐촌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항파두리성 내에 많은 사람들이 거주한 사실이 여러 가지 문헌과 유물·유적들로부터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할 것이다.

그런데 구전으로 전해지는 것과 같이 삼별초의 김통정 장군이 김방경 등의 려몽연합군에 의하여 패한 후 이곳 항파두성 자리는 완전히 황폐화되고 사람이 살지 않다가 그 후 약 320년 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설촌된 것처럼 볼 수도 있으나 모든 자료의 추찰(推察)과 마을 형성의 모든 조건을 통해서 볼 때 전혀 사람이 살지 않다가 갑자기 어느 시기에 와서 설촌되었다는 것에는 강력한 의심을 갖게 한다.

그러니까 고성리의 설촌은 항파두성 축성시부터 촌락이 형성되어 고려조 충렬왕 26년(1300년)에 설치한 제주도 14현촌의 한개인 귀일현에 속해 있다가 또 조선중엽에 우면(지금의 애월면)의 귀일리의 한 조그마한 촌락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 후 1730년대에 와서 우면이 신우면으로 변경되면서 귀일리는 상귀일리, 하귀일리로 분리되고 또 어느시기에 「日」자가 빠져 나가 상귀리, 하귀리로 변모하면서 고성은 상귀리에 포함된 촌락이 되었다.

그러나 1861년대에 제작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현존하는 항파두성을 토성으로 표시하고 그 밑에 고성리와 하귀리로 표시한 다음 그 밑에 파군봉으로 표시되어 있어서 1780년대에 출판한 「제주읍지」에 표기된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고성리는 1861년까지 면리제도에 의한 명칭으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바로 「고성리가 1884년에 분향되었다」는 구전은 「1861년 이후에 상귀리와 고성리가 합향한 다음에 분향한 것」이라고 주장 할 수도 있다.(제주대 사학과 강창용의 자료분석). 그것은 구전과 비교할때에 고성리가 상귀리와 분향 되었다가 다시 합향되었고 그 후 1884년에 재차 분향되었다는 사실이 되겠다.

그러나 이에 대한 고증을 위하여 역사기록이나 증언을 조사·탐문하였으나 그 이유를 밝힐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저자미상의 「제주삼읍전도」에도 항파두성을 고성으로 표시한 다음 그 밑에 상귀리와 하귀리로 표시할 따름이고 바로 여기서 고성리가 상귀리에 포함되어 있음을 명기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분향과 합향이 반복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은 자료 분석상의 문제로서 신빙성이 없다. 또 거듭되는 설명이지만 행정구역의 명칭이 변경되기 전의 고성리에 대한 기록은 신우면 고성리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분향에 대한 구전은 지금부터 100여년전의 사실로서 많은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에 의하여 명백한 사실임이 공인되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고성리가 귀일촌에 속해 있다가 1884년 상귀리와 분향되기까지는 상귀리에 포함되어 있는 마을로서의 고성리라는 명칭을 문헌상에 기록한 것에서부터 나오는 혼선에 기인한 오유라고 파악할 수밖에 없다. 최근의 구전일수록 기록보다 사실에 접근하는데 신빙성이 더 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문헌상의 기록을 분석검토한 내용에 의한 설촌역사를 살펴 봤지만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 관한 설촌역사에 대한 기록은 마을 「지동궤」나 「호적중초(戶籍中草)」가 마을에 보관되어 있거나 아니면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호구단자」나 「준호구(準戶口)」등이 잘 간수하여 두었다면 비교적 설촌이나 생활실태 등을 잘 파악 할 수 있지만 고성리는 그렇지 못한 관계로 공식 역사 기록이나 지도에 나타난 고증만으로는 마을의 실질적 내력을 찾아내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구전에 의하여 내려오는 마을에 관한 여러 가지 전설과 함께 설촌유래도 추정설로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항몽유적지로서 유명한 고성리와 관련된 역사는 사적 고증기록을 중심으로 밝혀야 함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리고 향토역사 탐구와 관련하여 항파두성의 유적에 대한 대대적인 학술조사가 이루어져서 귀중한 사적 자료가 발굴되어야 할 것이다.

(4) 박씨 설촌설을 중심으로 전해오는 유래

고성이 처음으로 설촌한 것은 조선 선조 34년 임진왜란 후 2년만인 1601년 박씨에 의하여 설촌되었다고 한다. 삼별초가 패망한 뒤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후 320년 동안은 역사적으로 공간을 이룬다. 조선 선조때 와서 동인·서인의 당파싸움으로 제주도로 유배된 사람들도 많았다. 이때에 동인은 사림파 김효원이 중심이 되고 서인은 훈구파 심의겸이가 중심 인물이 된다. 당시 송도 정철도 서인에 속하여 남해안으로 유배되고 안시열도 서인에 속하였기 때문에 제주도로 유배된다.

이 시기에 박언이라는 분의 아버지가 서인에 속하였으므로 선조 25년 제주도로 낙향한다. 박언은 벼슬이 선무랑공신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였는데 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당파싸움 관계로 조부와 부친이 별세하자 29세 나이로 임진왜란 중이지만 사임하고 모친 김씨를 동반하여 제주도로 와서 硏花村(연화촌)(지금의 제주시 연동)에 정착하고 제주 향교에 출입하면서 향교에서 성윤문목사를 만나게 된다.

때는 선조 25년 1월이었다. 성윤문목사는 박언의 부친과 절친한 친구였다. 성 목사는 박언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많은 지원을 하게 된다. 그는 귀일면 남쪽, 고려시 삼별초의 김통정 장군이 항쟁하였던 부근에 집터를 마련하여 주고 또 그 지역의 이름을 「항파두리」라고 지어주었다.「항파두리」란 명칭은 그 지역(지금의 고성리)의 지형이 물항아리 같고 인접한 남쪽에 장태(지금의 고성리 남쪽 안오름 뒤편 장털왓)가 있어서 물항아리에 장태로 물을 부어 넣는 형태에서 비롯된 명칭인데, 거기에 살면 약 200년간은 아무 탈 없이 부자가 되어 잘 산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성 목사의 도움으로 사당과 주택을 건립하는 도중에 선조 32년 3월에 박언의 모친이 별세하자 연화촌에서 소·대상을 치르고 선조 34년에 항파두리에 건립한 집으로 이사하였다. 성 목사는 특별히 사당을 지어 제를 지내게 했고 수복(제사를 맡아보는 사람)이까지 딸려 주었다. 사당에는 신라초대왕인 박혁거세시조 계왕위를 모시고 춘·추제를 봉행하였다. 박언의 집터는 지금의 고성리 김완국씨가 살고 있는 곳이며 현재 고성리 강위창씨가 살고있는 집터는 수복이가 살던 곳으로 오늘날까지 「수복이 터」라고 부르고 있다.

당시 박언(朴彦)의 집의 진입로가 지금의 김완국씨 댁의 진입로이며 그 진입로로 수복이터까지 남북으로 좁은 길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평대동(坪垈洞, 뱅듸가름)으로 들어가는 길은 지금의 문태준씨가 살고 있는 집 진입로로 하여 하천 동쪽으로 돌아 가고 문창택 집 진입로로 횡단하였다.

그래서 고성이 처음 설촌한 역사는 이때를 기준하여 계산하면 조선 선조 34년(1601)으로부터 약 400년이 되는 셈이다. 박언의 수(壽)는 80세, 配位(배위)는 진주 강씨이고 초소는 애월읍 금덕리 지경「평선이 모롤」에 있다. 박언의 아들은 승입(升立)이었고 손자는 유후(裕厚)였다. 유후는 분가하여 지금의 고성리 문신화씨 집터에 집을 짓고 살았으며 구내에 우물을 파서 그 우물 물로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지금까지도 그 곳을「박서 밭」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박씨 후손들은 모두 타지로 이주하여 지금은 고성리에 거주하고 있지 않다.

박씨 다음으로 김해김씨, 탐라고씨, 한양조씨 등의 순으로 입향하여 살았다는 일부 구전설도 있으나 향토지 편찬과정에서 위 고씨가 박씨보다 훨씬 앞서서 입촌하여 定住(정주)한 사실이 세보상의 기록과 구전에 의하여 밝혀졌다. 그것은 탐라고씨 고기문(高起文 - 고두만의 13세조)이가 상귀 지경인 「네빗데미」에 살다가 1550년대에 항파두리로 이주하여와서 정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해기씨 김정일(金鼎鎰 - 김세보의 11대조)이 1610년경에 해안에서 이주하여 와서 「호른도르」에 입촌하여 살다가 그 후 지금의 「뱅듸가름(평대동)」으로 이주하였고, 그 다음 1625년(인조 3년)경에 한양조씨가 입향하여 살았는데 지금은 그 후손이 모두 타지로 이주하여 한 가호도 없다.

1675년(숙종 1년)에 남평문씨(남제공파) 문우상(文遇尙 - 문춘희의 8대조)이 노형에서 이주하여 와서 살았는데 그 후손이 번창하였다. 이어서 김해김씨 김덕전(金德全 - 김홍근의 9대조)이 김해김씨로서는 두 번째로 입향하여 살았으며, 1712년(숙종 38년)에 경주김씨 김익채(金益彩 - 김순필의 8대조)가 명월에서 이주하여 정착하고 살았는데 그 후손이 지금도 많이 살고 있다. 뒤이어 1725년(영조 1년)에 진주강씨(염통악파) 강륭제(姜隆濟 - 강종실의 8대조)가 상가에서 이주하여 와서 살았는데 그 후손이 번창하여 현재 고성리에서 그 수가 제일 많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시기에 탐라양씨 양정찬(梁廷燦 - 양동희의 6대조)이 수산에서 이사하여 와서 정착하고 살았으며 자손이 번창하였다. 이어서 원주변씨 변성관(邊聖觀 - 변성원의 8대조)이 상가에서 건너와 살았다.

청주좌씨 좌광신(左光信 - 좌대성의 5대조)이 「조물캐(금성경)」에서 「외왓」에 이주하여 살다가 1913년경 본동으로 이사하여 현재까지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1901년 풍기진씨 진영표(秦永杓 - 징오봉의 조)가 수산에서 이주하여 와서 그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1903년경 광산김씨 김의철(金義鐵 - 김 진의 조)이 「너른냇도(안덕면)」에서 이사하여 정착 입향하였다.

같은 연대에 남평문씨(수산파) 문흥보(文興甫 - 문능홍의 6대조)이 수산에서 「뱅듸왓」에 입향하여 살았고 지금도 그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같은시기에 동래정씨 정영평(鄭永平 - 정태교의 조)이 금덕에서 「뱅듸왓」으로 이주하여 와서 살았으며 그후 진주강씨(수산파) 강영익(姜永益 - 강정훈의 조)이 광령에서「웃가름」으로 이주하였고, 탐라양씨(가락파) 양봉원(梁奉元 - 양병하의 조)이 명월에서 이주하여 왔으며, 양태평(梁太平 - 양여훈의 부)과 그 형제들이 신엄에서 입향하여 정착하였다.

그 외에 최씨, 홍씨, 이씨 등도 살았다고 하지만 입향내역을 알 수 없다. 그 후 여러 성씨들이 입향하여 정주하여 양촌을 이루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날에는 오늘날과 같이 한 마을이 형성되면 변동없이 몇 십년을 유지해 오는 것이 아니고 몇 가호가 주거를 정하고 살면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이동하여 집단거주형태의 취락구조를 이루어 살다가 차차 한 장소에 정착하여 현재와 같은 마을의 형태로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고성리도 「절비왓」, 「강석이왓」, 「호근드르」,「왜왓(瓦田)」, 「진군모를」, 「웃가름」 등에 집단으로 거주하던 사람들이 차차 현재의 위치로 이동하여 지금과 같은 마을의 형태를 이룬 것이다.

「호근드르」에는 김씨, 문씨 등이 살았었고 「강석이왓」에는 홍씨, 김씨가 살았으며 「진군모를」에는 박씨가 최근까지 살았음을 향노들이 기억하고 있다. 또 「왜왓(瓦田)」에는 오래전에 최씨가 살았었다고 하며 강씨, 손씨, 좌씨 등은 1900년대초까지 살았으며 진주강씨 강명규(姜明圭 - 강태수의 조)는 4·3사건 후에 본리로 이주하여 왔다. 「웃가름」에는 문씨, 강씨, 변씨 등 20여 세대가 살았었는데 4·3사건 후 1950년 재건할 당시 공비 침입에 집단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본동에 모두 집단이주하여 살아야 하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마을의 거주형태로 변모되었다.

그리고 법정리로서는 항파두리가 삼별초 당시 탐라의 12촌(縣)의 하나인 귀일촌에 속하였다가 조선 중엽 하귀리와 상귀리로 분리되고 고성리는 상귀리 상동에 속하였다가 서기 1884년 (고종 21년 갑신)에 고성리로 분리되었다. 고성리 분리는 금덕리 이좌수의 도움과 고성리 강성효의 노력이 컸다고 한다(상귀리 96세의 강상모씨 증언). 그러니까 이때부터 독립된 신우면 고성리로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5) 설촌연대에 대한 추정

이상에서 기술한 것은 박씨세보와 박씨후손인 박인방씨의 증언에 의한 내용이며 또한 각 성씨별 족보상의 기록과 마을 사람들의 구전으로 내려온 것들을 종합한 것이다. 그런데 과연 박씨가 고성리 설촌시조인가 하는데 대한 의문이 이번 설촌과정의 역사 자료를 찾는 마당에서 제기되었다.

그것은 탐라고씨 세보상에 나타난 기록인데, 고두만 씨의 13대조인 고기문이 상귀경인 「네빗데미」에 살다가 1550년경 항파두리로 이주하여 정착하였고 그 중손인 고상언(1612년생)이 고성에서 중문면으로 이사하였음을 고두만 씨가 증언하고 있다.

이런 상황으로 볼 때에 박씨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에 입도하여 약 9년 후에 고성 항파두리에 이사하여 살았다면 그보다 앞서서 탐라 고씨가 미리 항파두리 촌에와 살았다는 기록상의 고증이 되는 셈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오래전부터 박씨가 고성리 설촌시조하는 것이 구전으로 내려왔을까 하는 의문이 자연히 생긴다. 이같은 의문과 함께 설촌에 대한 이제까지 정설로 내려오는 마을 형성의 내역연대는 다시 한번 고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1600년대 이전에는 고성리에 사람이 살지 않았을까? 즉 항파두성이 함락된 후 폐촌하여 사람이 전혀 거주하지 않다가 박씨가 처음으로 1600년대초에 항파두리에 와서 살면서 촌락이 형성되었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제주도 역사 문헌상의 기록은 말할 것도 없고 인접 마을에 보관한 공·사적 기록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조사과정에서 장전리 고문서 속에 1590년대에 애월면이 좌면으로 표시된 토지문서를 발견하였고 고성리 마을이나 인접 마을의 뜻있는 분들이 한결같이 항파두성이 함락된 후에도 고성리에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리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도자기 조각들은 사람들이 집단으로 수세기동안 계속하여 살지 않았으면 오늘날에 와서 발견되기가 어렵다고 한다. (제주대 박물관 강창언의 증언) 절비왓, 진군모를, 강석이왓 등에서 고려말, 조선 초·중기의 것으로 보이는 도자기 조각이 많이 발견되고 있음(제주대학교 박물관 소장)을 볼 때 고성리 지경에 고려말부터 사람이 살아 왔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도자기 그림 참조) 그리고 배릿우영, 당터, 신당모를 등의 명칭들이 있는데 그것은 고성리에 집을 짓고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는 속칭어로 남아 있는 경우이기도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면 박씨 설촌시조설은 어떻게 볼 것인가? 여기서 제주목사 성윤문이 「항파두리」라고 리명을 명명했다는 근거는 앞의 여러 가지 문헌상의 기록에 의하여 명백히 와전임을 고증할 수 있으며 박씨 설촌설은 그 당시 제주목사의 특별한 지원으로 집터, 주택, 사당, 수복등의 혜택을 받으며 입향하였다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관이 후원하여 한 마을의 삶의 터를 장만해 주었고 계속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 수 있는 좋은 여건들을 조성해 주었을 터이므로 그 전부터 몇 가호밖에 살지 않던 마을에 차차 사람이 많이 살게되어 자연히 조그마한 촌락을 형성하기에 이르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목사의 후원으로 부와 권세를 얻게된 박씨가문이 득세하게 되고 그 후 몇 년 계속 지나다 보니 저절로 박씨가 설촌하였다는 구전이 생기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으로 보아진다. 족보이외의 기록상으로는 1600년대 이전에 고성리에 사람이 살았다는 내용이 보이지 않아 오랜 구전을 번복할 고증이 없으므로 현재로서는 박씨 설촌설을 수용하여야 한다.

그리고 설촌 시조의 정의를 제일 처음 거주자보다는 마을 형성의 결정적 공로와 동기를 가져온 사람을 설촌자로 본다면 충분히 타당성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하겠다. 그러나 앞의 탐라고씨의 거주년대의 족보상의 기록과 여러 가지 문헌상의 자료들과 도자기 파편 유물들을 더 면밀히 검토하고 더많은 고증 자료들을 수집 고찰하여 1600년대 이전부터 사람이 거주했다고 추측되는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는 조건으로서 무엇보다 맑은 샘이 있어서 식수원으로 항상 마르지 않아야 되고, 그리고 기름진 땅과 풍수해가 없는, 교통이 편리하고 산천이 아름다운 고장이어야 하기 때문에 이 모든 조건을 갖춘곳이 항파두리 고성이므로 삼별초군이 평정된 후에도 계속하여 몇 가호의 사람은 살았을 것으로 짐작이 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고려말부터 시대순으로 나타나는 도자기 유물들이 발견되는 것도 더욱 설촌년대의 고증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자연환경과 역사적 배경 및 유물 등을 고려해 볼 때 고성리 설촌년대는 고려말로 거술러 올라갈 수 있으므로 약 700여년의 역사라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더 연구 검토하여 사적지의 설촌 역사를 고증자료에 의하여 더 소상히 밝혀 나가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항파두리 명칭 유래

고성리의 옛 이름인 「항파두리」의 명칭이 지형을 뜻함인지, 혹은 다른 어떤 뜻에서 연유 되었는지, 또 언제부터 누가 명명해서 오늘날까지 불러 왔는지 하는 것 등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 보는 것은 설촌내력을 밝히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된다. 「항파두리」의 명칭에 관련된 문제들을 문헌상의 기록과 여러 사람들이 연구하여 발표한 내용을 바탕으로 분석하여 본다.

우선 「항파두리」의 항파라는 명칭은 앞에서 살펴 본 문헌자료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삼별초의 김통정 장군이 항파두성을 축성할 때부터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531년에 간행된 「新增東國餘地勝(신증동국여지승람) 제 38권 濟州牧(제주목) 古跡條(고적조)-古土成」에 보면 「항파두고성」으로 표기된 것으로 볼 때에 이미 고려시대 삼별초가 항파두리에 내·외성을 축성할 때부터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조선중엽 성윤문 제주목사가 명명했다는 박씨 후손의 주장은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다음에는「항파두리」명칭의 뜻에 관하여 살펴본다. 고성리 출신 향토사학자 문선희가 발표한 내용을 보면, 귀일촌 항파두(지금의 애월면 상귀리, 고성리)는 삼별초의 김통정 장군이 천혜의 요새에 장소를 정하고 항파두성의 축성에 들어 간다고 하면서 고성리의 지형이 항아리 모양이므로 항아리 「항」자인 「缸(항)」자를 쓰고 바두리는 언덕이 있는 들이라는 옛말로서 「파」자도 한자의 언덕파인「坡(파)」를 써야 한다고 하여 「항파두리」는 물을 깃는 항아리 형태로서 고성리 마을의 지형을 나타낸 이름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는 설로서 향토사학자 박용후의 발표가 있었다. 「박용후, 제주도 옛 땅 연구」의 제주문화편에 보면, 『항바두리는 고성리이니「항바두리」의 「항」은 항아리의 옛말이고 「바두리」는 옛말 「바도리」의 와음으로서 「항바두리」는 땅의 형국을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항아리는 목이 가늘고 바도리(나나리-땅벌)는 허리가 가늘어서 둘다 같은 모양이므로 항의 목과 바도리의 허리와 같은 지세라고 하여 생긴 이름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항바두」는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요 「바」를 파로 표기한 것은 「바」의 한자음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두 주장이 모두 지형·지세를 의미하는 내용은 같으나 다만 순수 우리말을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 사용한 이두 형식에 의하여 표기했다는 것에만 차이가 있다. 또 조선 중엽 제주목사가 명명했다고 하면서 박씨손에 의하여 구전으로 내려오는 내용도 항아리 형태의 지형과 북쪽의 장태모양의 물그릇으로 물을 부어 넣는 지세이므로 「항파두리」라 리명을 지었다고 주장하고 있어서 모두 지형에 관련된 이름이라는 것에는 다 같이 공통된 맥을 갖고 있다 하겠다.

즉, 『고성리의 속칭인 「황(항)바두리」는 성의 호칭이며 항파라는 것은 몽고어에 기인한 지명과도 같다고 볼 수 있으며 또 삼별초가 강화도의 항파강의 명칭을 빌어 그 강의 상류라는 의미에서 「항파두리」라 이름을 붙이고 불렀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로 성의 평지와 구릉을 연결하여 평평한 산성이 되었다. 두리는 성 주위 즉 도리, 두리계의 지명으로서 주위를 뜻한다.

혹은 동산 같은 위치에 있는 것으로서 그 명칭이 생겼다는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두리와 평야의 뜻은 전으로서 면·리의 의미로 사용된다고 사료되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이다. 이같은 주장은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출발하여 고성리에 본거지를 정하여 항몽하였고 강화도에 항파강이 있음을 참작하면 충분히 더 검토하고 조사해 볼 가치가 있음을 느낀다.

또 여기서 항파두리라는 용어의 한자표기에 대해서 검토해 보면 역사 문헌 자료에는 모두 「缸波頭理(항파두리)」로 나타내어 있고 제주도를 나타내는 고지도에는 「缸破頭理(항파두리)」또는「缸坡頭理(항파두리)」로, 향토사학자(문선희, 홍순만 등)의 주장으로는 지명과 관련하여 즉 지형의 뜻에 맞추어서 「缸坡頭理(항파두리)」로 표현하고 있다. 언덕 파인 「坡(파)」자를 쓰느냐, 물결 파인 「波(파)」를 쓰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앞에서 보듯이 지형을 중심으로 면칭이 만들어졌으며 언덕 「파」자인「坡」를 쓰는 것이 옳은 것이요, 「항바두리」의 순수 우리말을 이두 문자 표기법으로 한자음을 따 와서 사용했다면 물결 파인 「波」자를 쓸 수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항바두리」가 우리 말이 아닌 몽고어이면 몰라도 순수 우리말인 항아리를 뜻한다면 항아리 항자인「缸」자와 언덕 파인 「坡」자를 사용하고 두리만큼은 이두식 한자표기로 표현하여「缸坡頭理(항파두리)」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더 타당한 주장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좀 더 면밀하게 검토하여 확실한 고증 자료를 찾아내어 밝혀야 할 줄 안다.

그리고 고성이라는 명칭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마을 명칭과는 관계없이 고려시대인 1273년 항파두성이 함락된 후부터 옛 성터의 이름으로 불리어 왔을것으로 본다. 앞에서 살폈지만 기록으로는 고려시대부터 여러 문헌에 고성으로 표기되고 있다. 고려시대까지 고성으로 불러 오다가 1600년대에 와서 고성촌, 고성리라는 마을 명칭으로 명명된 것 같다(탐라지에 기록 되었음). 고려때부터 나타난 고성이 현재 고성리 마을을 의미하는 것으로는 볼 수 없으나 고성리 마을 명칭과 관련시켜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독립된 망을 명칭으로는 1880년대에 와서 고성리로 불리어진 것 같다.

그러다 1998년 1월 1일 부터 양잠단지가 고성2리로 분리됨에따라 본동은 고성1리로 개명되었다.

역대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