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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희생회 군자금 모금사건(조봉호) 게시물 상세보기
제목 독립희생회 군자금 모금사건(조봉호)
작성자 관리자 조회 1,448 회

     서기 1919년 중국 상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 군자금을 조봉호(趙鳳鎬), 김창국(金昶國) 등 기독교인들과 문창래(文昌來) 등이 모금하여 송금(送金)하였다가 발각되어 검거된 사건이다.
     이 사건에는 귀덕리의 조봉호(趙鳳鎬)와 법정항쟁사건의 연루자 강봉환(姜奉煥)이 연루되어 있다.

1. 조봉호(趙鳳鎬)

     성명 : 조봉호(趙鳳鎬)
     본적 : 제주도 구우면 귀덕리(濟州島 舊右面 歸德里)
     나이 : 34세
     직업 : 농업
     죄명 : 정사법, 출판법 위반
     형기 : 1년
     판결법원 : 대구복심법원
     비고 : 1920년 4월 28일 옥사

     ※ 1963년 대통령 표창 수상
     ※ 1997년 건국포장 수상
     ※ 1990년 애국장 수상


2. 강봉환(姜奉煥)

     성명 : 강봉환(姜奉煥)
     본적 : 제주도 구우면 금악리(濟州島 舊右面 今岳里)
     나이 : 52세
     직업 : 농업
     죄명 : 정사법, 출판법 위반
     형기 : 2년
     판결법원 : 대구복심법원

     ※ 1995년 애족장 수상      

Ⅰ. 판결문

     1. 조봉호의 판결 기록

         본적 및 주소 : 전라남도 제주도 제주면 삼도리(濟州面 三徒里)
                        대서업자 용인 (최정식) 22세
         본적 및 주소 : 전라남도 제주도 제주면 이도리(二徒里)
                        농업 조봉호(趙鳳鎬) 34세
         본적 및 주소 : 전라남도 제주도 신우면 애월리(新右面 涯月里)
                        농업 문창래(文昌來) 35세

     위의 피고 최정식·조봉호에 대한 정사법 및 출판법 위반사건. 피고 문창래에 대한 정사법 사건에 대하여 1919년 9월 25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언도한 판결에 대하여 피고 3명이 공소를 신립하였으므로 본원은 조선총독부 검사 야전병웅(野田병雄) 입회 심리를 거쳐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주         문

원 판결을 취소한다.
피고 최정식을 징역 1년 6월에 처한다.
피고 조봉호를 징역 1년에 처한다.
위의 피고 양인에 대하여 미결 구류 일수 30일을 각 본형에 삽입한다.
피고 문창래를 무죄로 한다.
압수 물건 중 선포문 9매, 해외 통신과 제반 사항 1매, 통신 사항 7매는 이것을 압수하고, 기타 압수 물건은 차출인에게 환부한다.


     2. 조봉호의 옥사 사실 증명서

         본적 : 전라남도 제주도 구우면 귀덕리 1292번지
         주소 : 상동
         성명 : 조봉호(趙鳳鎬) 1884년 5월 12일생
         입소년월일 : 1919년 10월 2일
         죄명 : 대정8년 제령7호 및 출판법 위반
         형명·형기 : 징역 1년(통산 30일)
         출소년월일 : 1920년 4월 28일
         출소사유 : 사망

                      상기와 같이 당소에서 복역한 사실이 있사옵기 증명함.

                                      서기 1962년 2월 19일
                                                   대구교도소장 전옥 이유근 (인)

     3. 조봉호의 인품

     조봉호는 동지들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막기 위하여 자진하여 모든 책임을 혼자 질 것을 결심하고 구속된 동지들에게 연통하여 동지들을 구하였다. 그리하여 동년 9월 25일에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최정식(22세)은 3년, 조봉호(27세)는 2년, 문창래(35세)는 6월의 형을 언도받았는데, 대구복심법원에 공소하여 동년 11월 12일에 최정식 1년 6월, 조봉호 1년, 문창래 무죄로 확정되어 복역중 조봉호는 1920년 4월 28일에 대구형무소에서 옥사 하였다.
     조봉호는 귀덕리 사람으로 부농 조만형(趙萬馨)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경신(儆新)과 숭실학교(崇實學校)에서 수학하여 기독교에 귀의하고 제주교회 창립 당시 이기풍(李基豊) 목사를 도와서 조사(助師)로 일을 보았다.
     애월읍 금성리 교회는 그가 설립한 교회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독립운동에 동분서주하며 말 그대로 생명과 재산을 조국 독립을 위하여 바치고 38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그러나 그가 옥사할 때 가정은 동가식서가숙하여 유해를 가족들이 인수하지 못하였으므로 1945년 광복이 되어도 잠든 묘소가 없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건국공로훈장을 그의 유가족에게 내렸고 1977년에 사라봉 모충사(慕忠祠)에 도민의 이름으로 기념비가 건립되어 그에게는 순국지사의 칭호가 허락되었다.

     4.. 조봉호의 생애

(1) 독립희생회(獨立犧牲會)의 밀사(密使)

     조천에서 일어났던 독립만세 운동은 일경(日警)의 무자비한 탄압에 의해 전도에 파급되지는 못했으나 이 지방 사람들에게 독립사상을 일깨워주고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따라서 조천만세운동은 이 지방 독립운동사에 새 장을 기록한 금자탑이었다.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14인의 지사들이 체포 구금되어 고초를 겪고 있다는 소식은 이 동네 저 마을로 전달되어 뜻있는 사람들의 피를 끓게했다.
     망국의 한이 다시금 되살아난 것이었다.
     만세운동의 풍랑이 표면적으로 가라앉은 그 해 5월 7일 상오 제주∼목포간 선편(船便)으로 산지 부두에 내린 초라한 모습의 젊은이가 있었다.
     삼엄하게 쳐진 검문망을 무사히 뚫고 시내로 향하는 그의 손에는 품팔이 나갔던 노동자가 귀향할 때 들고 다니는 네모난 트렁크가 들리고 있었을 뿐 누가 보아도 거동이 수상하게 보이지 않은 순수한 노동복 차림이었다.
     잰걸음으로 관덕정 앞을 벗어나 얼마 후 청년이 닿은 곳은 비교적 현대식 건물로 일반의 눈길을 모았던 제주서부교회였다.
     때마침 이 교회의 창설자 이기풍(李基豊) 목사는 오전 예배를 마친 다음 10여명의 신도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젊은이는 성큼 이목사 앞으로 다가섰다.
     "목사님, 조봉호 선생을 뵈러 왔습니다."
     순간 이목사의 눈이 번쩍 빛났다.
     "어디서 오셨소?"
     그러나 그 대답을 더 기다리지 않아도 좋았다.
     키가 헌출한 30대 후반의 신사가 두 사람 앞에 나타난 것이다.
     "제가 조봉호입니다. 어디서 오신 손님이신지..."
     굳어졌던 젊은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기쁨으로 변했다.
     "아, 그렇습니까, 경성에서 왔습니다. 처음 뵙습니다. 김창규(金昌圭)입니다."
     심상찮은 대면임을 짐작한 이기풍 목사가 자리를 뜨자 넓은 예배당 안은 조봉호, 김창규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조선생님, 독립희생회 일로 왔습니다. 조용한 장소로 좀 안내해 주시죠."
     독립희생회(獨立犧牲會). 듣던 명칭이었다.
     듣고만 있을 뿐 아니라 어떻게 연락이 닿지 않을까 해서 노심초사 기다리던 이름이었다. 김창규의 손을 덥썩 잡은 조봉호는 그가 기식하고 있던 교회숙직실로 원래의 진객을 안내했다.
     당시 조봉호는 고향인 구우면(지금의 한림읍) 귀덕리에 가족을 남겨두고 이기풍 목사와 함께 제주교회 창설에 관여했으며 독실한 신앙심을 키우며서 조국광복에 대한 애국정열을 불태우고 있었다.
     이러한 그에게 조천만세사건은 타고 있는 등잔불에 기름을 붙는 격이 되었고 새로운 신념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때가 오면 언제든지 한몸을 기꺼이 던져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는 국권회복에 초석이 되리라고 결심한 조봉호에게 얼마전 날아온 소식은 중국상해에 우리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해외 망명가들의 독립운동을 돕기 위한 기금모집에 적극 나서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비밀결사인 독립희생회와 연락할 길이 없을까 하고 얼마전 나가는 인편을 통하여 부산에 있는 백산상회(白山商會. 독립희생회 본부)에 그 뜻을 전한 후 초조한 나날을 보내던 조봉호에게 김창규의 출현은 너무나 뜻밖이었고 감격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 조봉호는 조천만세운동에 자극받아 제주읍에서도 봉기할 길이 없을까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궁리하면서 김창국(金昶國), 최정식(崔靜植) 등 교회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거사에 관한 밀의를 거듭했으나 일경(日警)의 감시가 너무 심해  그 뜻을 펴지 못했던 것이다.
     교인이 중심이 되었던 제주읍에서의 독립만세 거사계획은 그해 3월 24일로 되어 있었다.

(2) 청년혁명가

     이러한 배경 때문에 조봉호의 구국운동은 만세운동에서 벗어나 독립기금을 모으는 것으로 그 방향이 급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산상회 점운을 가장한 김창규는 독립희생의 연락원으로 전국을 누비고 다니면서 새 동지들을 포섭하고 이미 모급되고 있는 기금을 거두어 상해임시정부로 송금하는 역할을 담당한 패기만만한 젊은 혁명가였다.
     잠시 제주에서 벌어졌던 독립운동기금사건을 쓰기에 앞서 독립희생회와 관련하여 상해임시정부의 구성이 어떠했고 그 활동이 어떠했던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내 방방곡곡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던 3·1만세운동은 멀리 중국, 시베리아, 만주, 미주 등 해외에서 싸우던 망명가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변화를 안겨줬다.
     그리하여 새로운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그 해 4월 상해에서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추대하고 이동녕(李東寧)을 의정원(議政院) 원장으로 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세계에 널리 선포했다.
     임시정부는 임시헌장(臨時憲章)을 제정하고 국회격인 의정원(議政院)과 정부인 국무의원(國務議院)을 두어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체제를 성립시켰다.
     또한 임시정부는 「연통제(聯通制)」라는 것을 채택하였는데 이 연통제는 국내와의 비밀연락망을 조직하여 자금조달과 독립운동을 지휘케 한 것이 그 내용이며 임무였다. 독립희생생회는 이 연통제에 의해 국내에 조직된 강력한 비밀결사였다.
     그러면 국내에서 그 막중한 책임을 걸머진 독립희생회를 지휘한 사람은 누구며 그 활동은 어떤 것이었나.
     항도부산(港都釜山)에 설립된 해산물 위주의 무역회사 백산상회(白山商會). 그 사장인 안희제(安熙濟)가 다름아닌 독립희생회의 지휘자였다.
     「白山」이라는 상회이름 역시 안희제의 아호를 딴 것이다.
     안희제의 인물됨과 그 업적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특기할 만큼 찬란한 것이었다. 임시정부가 수립될 당시 24세의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던 안희제는 처음 임정첩보원으로 발탁된 이래 줄곧 독립운동에 몸을 바쳐 항일지사로서, 육영사업인으로서 다방면에 걸쳐 특출한 수완과 명성을 떨쳤다.
     청년혁명가로 독립기금을 스스로 조달하기 위하여 백산상회를 설립하고 독립희생회를 지휘한 그는 후에 발해농장(渤海農場)을 만주(滿洲)에 세워 민족의 진취성을 함양했으며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기미육성회를 창설하는 등 그의 수완과 활동이 눈부셨다.
     안호상(安浩相), 김범부(金凡夫), 전진한(錢鎭漢), 신성모(申性模) 등 해방 후에 두각을 나타냈던 많은 인재들이 안희제의 장학기금에 의해 배출된 사람들이었다.
     또 민족지(民族紙) 동아일보(東亞日報)가 창설될 때 발기인의 한 사람이었던 그는 「도덕(道德)이 수반되지 않은 경제(經濟)는 정당한 경제가 아니며 경제가 수반되지 않은 도덕 또한 정당한 도덕이 아니다.」라는 어록을 남겨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뜻을 밝히고 경제의 사회성을 후세에 경고하기도 했다.
     백산(白山)이 국내에서 독립기금을 조달한 무렵의 다음 일화는 그의 인격과 높은 경륜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경주(慶州)의 갑부 최준(崔浚)은 그의 친구 안희제의 권고에 따라 많은 돈을 독립기금으로 대어줬다. 그러나 그 돈이 과연 정확하게 전달됐는가는 반신반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뒷날 백범 김구가 환국한 후 그 경위를 이모저모로 실증한 결과 단 한푼도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때 최준은 다시한번 백산의 공명정대한 큰 뜻을 높이 받들어 탄복한 끝에 그의 묘소가 있는 곳을 향하여 "어리석은 이 최준을 용서하소서."하고 통곡했다 한다.
     독립운동의 국내모금을 도맡은 독립희생회의 내막과 상해임시정부의 활약상을 김창규로부터 소상히 들은 조봉호는 이제야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마음속 깊이 깨달았다. 김창규의 말은 이어진다.
     "............그러니 조선생께서 제주도에서 독립희생회를 조직해 주십시오. 회원은 남녀노유 누구나 들어올 수 있게 하고 취지에 찬동하여 일단 회원이 되면 1인당 2원시의 기금을 헌납해야 합니다."
     뚜렷한 대의명분 앞에 아무것도 주저할 것이 없었다.
     당시 37세여던 조봉호는 비록 연하이긴 했으나 김창규의 거침없는 달변과 열화같은 애국심에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구말구요, 하다뿐입니까. 신명을 바쳐 이 일을 꼭 성취시키겠습니다."
     즉석에서 동지가 될 것을 찬동한 조봉호는 김창규가 숨겨온 임시정부 포고문과 해외 통신문을 받아들었다.

(3) 극비리에 조직진전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 임시정부선포문 제 1 호.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집정관총재(임시대통령)로 이승만을 추대하고 의정원원장에는 이동녕을 추대한다. 또한 임시정부각원제위의 합의에 따라 임시정부헌법을 제정하여 국체(國體)는 민주제(民主制를) 채용하기로 의결하였다.』

◈ 임시정부령 제 1 호.
     『아국민(我國民)은 3·1운동을 통하여 민족의 자주성과 독립국임을 널리 세계에 선포한 이래 이제 떳떳한 독립국민임을 거듭 확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적(敵)의 노예가 아니라 당당한 독립과 자주성을 갖는 민족이 될 것이며 추호라도 적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

◈ 해외통신문 제반사항.
     『한국인 삼백만명이 한국독립청원서에 연서날인(連書捺印)하여 미국정부에 제출하였던 바 미국정부는 외무대신에게 위임하여 파리 강화회의에 김규식(金奎植)을 참석할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고 약속했다.』

◈ 통신사항.
     『중국과 에스파니아가 우리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미국·영국·프랑스의 국회에서는 한국문제가 거론되게 되었다. 또 미국과 영국에서는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는 단체들이 생기게 되었다.
     해외통신에 의하면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였으나 일본이 강경하게 반대하므로 아등정부(我等政府)는 즉시 최후통첩을 발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일본이 우리의 독립을 저지 반대한다 해도 이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은 광복의 그날까지 줄기차게 계속될 것이다. 또 임시정부는 많은 군대를 양성하기 위한 준비를 서둘고 있다.
     군대는 미국의 지원을 받을 것이며 군량을 우방들이 부담할 것이다.
     그러나 군대를 양성하여 전투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많은 군자금이 필요하므로 전비부족금(戰費不足金) 오천만원은 국내에서 부담해야 할 것이다.』

     임시정부선포문과 해외통신문을 읽어내려가는 조봉호의 피가 뛰기 시작했다.
     그 내용으로 미루어 조국광복을 위한 해외망명가들의 활약이 눈부시지 않은가.
     더구나 그의 가슴을 부풀게 한 것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군대양성을 준비하고 있고 세계의 열강들이 이를 지원한다는 사실이었다.
     나라가 망한 것은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힘을 기르기 위한 독립군의 양성을 위해 군자금의 일부를 조달하는 중대한 임무가 다름아닌 자신에게 맡겨졌다.
     조봉호는 비로소 설 땅을 찾은 것이 그지없이 기뻤다.
     그는 서부교회에서 집사일을 맡고 있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최학서(崔鶴瑞)를 통하여 미리 친분을 맺었던 그의 아들 최정식(崔靜植)을 제1의 동지로 포섭하기로 결심했다.
     최정식은 그 나이 스물두살의 약관이었으나 문장이 뛰어나고 달필인 보기드문 수재였다.
     전북삼례(全北三禮)가 고향인 그의 집안은 아버지 최학서가 제주성내에서 놋그릇 장사를 경영하는 관계로 비교적 부유한 생활환경을 누리고 있었으나 날로 심해가는 일제의 민족차별정책 때문에 청운의 뜻을 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좌절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최정식은 발족된 지 얼마 안된 금융조합 서기로 잠시 일한 적도 있으나 뛰어난 필력이 인정되어 대서소의 서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조봉호는 삼도리(三徒里)에 살고 있는 그의 집을 찾아 최정식을 만나고 독립희생회이 내막과 상해 임시정부의 활동상, 그리고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자금 모금운동이 전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사실을 김창규로 부터 들은 그대로 말해주고 제주도에서도 두 사람이 주동이 되어 군자금을 모으기 위한 독립희생회를 조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젊은 혈기를 발산할 돌파구를 찾지 못하여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최정식이 즉석에서 찬동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는 있었으나 평소부터 신의를 걸어온 지기지우(知己之友)였다.
     이튿날 김창규와 더불어 다시 회합을 가진 세 사람은 독립희생회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조직을 활용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이에 앞장설 사람으로 제주교호회의 김창국(金昶國) 목사는 조봉호와 평소에 친분이 두터웠을 뿐 더러 이기풍 목사 다음가는 지방종교계의 선각자여서 그 미치는 영향이 매우 컸다.
     그러므로 김목사만 나서준다면 윤식명(尹植明) 목사는 물론 윤정찬(尹貞燦) 목사까지도 별 이의 없이 동조해 주리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다음날 조봉호는 동지 최정식을 불러 임시정부선포문과 해외통신문의 내용 및 취지를 많은 도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등사해야 할 테니 그 준비를 서둘러 달라고 당부하고 제주교회로 김창국 목사를 찾았다.
     내실에서 이루어진 두 사람의 밀담은 조봉호가 예상했던 대로 급진전을 보았다.
     조봉호의 손을 덥썩 잡은 김창국 목사는 교회의 할 일이 선교에만 있는 것이아니라 민중을 계도하고 백성의 의무를 불러일으켜 애국심을 북돋는데 있다고 오히려 설파했다.
     조봉호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김목사는 두 윤 목사를 자신이 책임져서 포섭할테니 나머지 필요한 일을 먼저 추진하라고 정성어린 격려까지 아끼지 않았다.

(4) 모금활동

     삼도리에 있는 최정식의 집과 서부교회는 독립희생회의 연락원 김창규를 비롯, 조봉호, 김창국, 최정식 등 네 사람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밤시간을 더 많이 이용했다. 그 사이 동지가된 사람이 다름아닌 김창언(金昌彦)이었다.
     광주지법 제주지청 직원으로 있던 그는 대서일을 보는 최정식과는 공용관계로 늘 대면해 온 사이였다.
     최정식은 김창언의 찬동만 얻게 되면 법원에 있는 등사판을 이용할 수 있어 임시정부선포문과 해외통신문을 등사하는데 용이하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술을 좋아하는 김창언을 최정식이 불러내어 객주집 안방에서 두 사람이 대좌한 것은 조봉호의 당부를 받은 지 사흘 후의 일이었다.
     "창언이! 우리가 큰 일을 하고 있네. 자네의 힘을 좀 빌어야겠어."
     거사의 내용을 대충 들은 김창언은 모처럼의 중대임무가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대견스러운 듯 등사관계는 자기가 맡겠다고 선뜻 승낙했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그날밤을 통음으로 지세웠다.
     그로부터 1주일 후 정확히 말해 1919년 5월 25일 저녁 무렵. 법원지청과 최정식의 집을 잇는 어두운 골목길에는 야음을 이용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무엇인가 무거운 물건을 운반해 가고 있었다. 법원의 등사판을 몰래 빼내 옮겨가는 최정식과 김창언이었다.
     그날밤 최정식의 거실에서는 김창규, 조봉호 등 동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2백여매의 전단이 비밀리에 등사되고 있었다. 물으나마나 임시정부선포문과 해외통신문이었다.
     이틀 후 대정교회를 거쳐 정의교회에 다녀온 김창국 목사는 윤식명 윤정찬 두 목사의 찬동을 얻어 교인들 사이에 사실상의 모금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알려왔다.
     이 소식은 독립희생회의 비밀조직을 가속화시켰고 독립을 쟁취하려는 국내외 동향을 도민들에게 알리기 위한 당초의 거사계획을 더욱 촉진시켰다.
     동지들을 자기의 처소로 소집한 조봉호는 지체없이 전단살포 계획을 실행한다는 원칙을 거듭 확인한 다음 지역별로 그 소임을 분담하여 빠른 시일 안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따라 조봉호와 최정식은 전도에 걸친 연락망을 펴면서 교회조직 외에 일반 주민을 대상으로 한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하고, 김창국 목사는 제주교회의 책임을 맡아 구좌면 세화리에서 구우면 수원리까지, 대정교회는 윤식명 목사 책임 아래 한림리에서 중문리까지, 정의교회를 책임진 윤정찬 목사는 중문면 동원리에서 구좌면 상도리까지를 각각 담당하기로 책임한계가 정해졌다.
     이리하여 1919년 5월 28일과 29일 사이에 전도 주요지역과 교회에는 임시정부선포문과 해외통신문이 이들에 의해 일제히 배포되었다.
     제1차적인 거사목표는 바야흐로 성공을 본 셈이었다.
     전단을 배포하는데는 무엇보다도 독사같은 일경(日警)의 눈을 피해야 한다는 작전상의 애로가 있었기 때문에 거리에 격문을 붙이거나 강연을 통하여 대중에게 그 취지를 알리는 등의 노출된 방법이 허용되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확신이 서는 사람을 대상으로 동지적인 설득을 해야 했던 만큼 그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두 가지의 전단을 입수한 도민들은 너무나 충격적인 사실에 벅찬 감격을 누를 길이 없었다.
     망국의 한을 삼키던 인사들 중에는 비분의 눈물을 뿌리면서 자진 헌금하는 이도 있었고 특히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인들은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 헌금에 나섰다.
     교회조직은 군자금을 모금하는데 있어 산파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에 찬동한 일반 도민들의 출금도 괄목할 만했다.
     신우면 애월리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문창래(文昌來. 34세)는 원래 조봉호와 친분을 맺어온 사이였으나 뒤늦게 거사계획에 찬동하고 독립희생회의 회원일 된 후 친척인 문창숙(文昌淑)을 비롯한 부유층 가정을 비밀리에 순방하면서 취지를 설명하여 동조를 얻은 다음 끈질긴 권유를 펴 적지 않은 기금을 모아 조봉호에게 수교하였다.
     이 밖에 제주면 출신 홍기철(洪基撤. 32세)은 5월 26일 아침 우연히 최정식의 집에 갔다가 여러 동지들이 임시정부선포문과 해외통신문을 등사하는 현장을 목격. 즉석에서 그 취지에 찬동한 후 성내의 유력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이를 배포하여 모금운동을 크게 뒷받침했다.
     특히 김창국 목사는 신도들을 모아 상해임시정부는 우리의 독립을 쟁취한 총본산이며 거기에서 양성되는 군대는 독립운동의 선봉대로 활약할 것이므로 한국인은 누구나 이를 원조해야 한다고 역설, 교회에서의 헌금운동을 적극 선도했다.
     모금기간 동안 조봉호의 활동무대는 제주면을 중심으로 북제주군 일대에 걸쳐 종횡무진했다.
     독립희생회에 가입한 후 모금활동을 벌이다가 일경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았던 이도종(李道宗) 목사도 조봉호의 권유에 따라 동지가 된 사람이었다. 1908년 조선예교장로회 전도목사 이기풍의 전도를 받아 예수교에 귀의, 아버지 이덕연(李德連) 및 조봉호와 더불어 금성(錦城)교회를 설립한 그는 1932년에 출간된 「조선예수교 장로회사기(朝鮮예수교 長老會史記)」에도 오를 정도로 전도사업에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그는 독립운동 기금사건으로 5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나와서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북 김제의 중앙교회를 비롯, 뒤에 효돈(孝敦), 법환(法還), 중문(中文), 고산(高山), 두모(頭毛), 신창(新昌), 화순(和順)교회 설립에 앞장서는 등 교회발전에 적지 않은 발자취를 남겼다.
     이목사는 금성교회를 설립한 후 문맹퇴치에도 기여했으며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한쪽의 관절이 불구가 되는 상처를 입었으나 해방이 된 뒤에도 그 아들 영복(永福)에게까지 독립운동의 내막을 비밀에 부쳤던 의지의 지사(志士)였다.
     뼈아픈 상처를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한 어버이의 지극한 사랑이 앞장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도종 목사는 해방된 조국에서 선도사업에 전념하다가 4·3사건으로 공비들에게 납치되어 수교하는 또다른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의 시체를 대정읍 인향동에서 찾은 것은 죽은 후 1년 후의 일이었다.
     각처에 전단이 배포되고 독립희생회도 지부가 조직된 후 약 50일동안 군자금 모금운동에 호응한 사람은 4,450명이나 되었고 이들이 헌금한 돈은 무려 1만원에 달했다.
     관리의 월급이 많아야 30원하던 때라 1만원이란 돈은 그야말로 거금이었다.

(5) 독립군간부(獨立軍幹部) 파유계획(派遺計劃)

     조봉호, 최정식, 김창국 등 독립희생회 간부들에 의해 모아진 각계의 성금은 연락원 김창규의 손으로 상해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 앞으로 송금되었다.
     그러나 이 엄청난 비밀이 오래 간직될 수는 없었다.
     조천만세 운동 이후 여러 가지 동향을 감시하기에 혈안이 되었던 일경(日警)이 3백여장이나 뿌려진 임시정부선포문과 해외통신문을 놓칠리 만무했다.
     더구나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은 도내 각지에서 올라온 정보를 종합분석한 결과 문제의 전단이 시간의 격차를 두어 배포된 것이 아니라 거의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전도에 걸쳐 뿌려졌다는 사실이었다.
     이쯤되면 예상밖의 큰 배후가 있을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만세사건 이상으로 조직적이며 계획적인 사건모의가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사태의 중대성을 직감한 일경은 병력을 총동원한 가운데 주모자 색출을 위한 비상망을 폈다. 그런데 천우신조였을까.
     이 같은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독립희생회의 조직과 군자금 헌금운동은 드러나지 않았고 김창규가 7월 중순 1만원의 헌금을 송금할 때까지 그들의 수사는 별 진전이 없었다.
     독립희생회의 비밀조직과 활동은 그만큼 주도치밀했다.
     거기에 1차 목적을 달성한 조봉호, 김창규 등 독립희생회 간부들은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임시정부에서 양성하고 있는 독립군의 간부후보생을 현지에서 차출, 상해에 파견하기 위한 원대한 계획을 실현하기에 이르렀다.
     이 파견계획에 선발된 사람이 모금운동에 앞장섰던 최정식을 비롯 신현범(申鉉範. 20세), 김치택(金致澤. 21세) 등이었다.
     세 사람은 모두 독립희생회의 청년회원들이었으며, 신현범과 김치택은 다같이 제주면 출신들이었다.
     세 사람의 청년이 조봉호의 거처에 모인 것은 그해 7월 13일이었다.
     청운의 뜻을 펼 길이 없을까하여 노심초사하던 세 사람은 날 듯이 기뻤다.
     독립군의 간부후보생이 그 얼마나 소망스럽고 벅찬 대명사였던가.
     장시간에 걸친 숙의 끝에 농민이나 상인으로 변장하여 상해로 탈출한다는 원칙에는 뜻을 같이 했으나 거기에 심각한 문제가 등장했다.
     다름아닌 상해까지의 여비를 어디서 어떻게 염출하느냐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궁하면 통한다고나 할까. 이 난제에 뛰어든 사람이 법원지청 직원으로 군자금 모금에 크게 기여한 김창언이었다.
     그는 법원지청의 등사판을 몰래 빼내어 전단을 만든 후에도 계속 조봉호를 보필하여 1급참모 역할을 하고 있었다.
     또 문제의 등사판은 단순한 도난사건으로 취급되어 더 이상의 수사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조봉호에게 말했다.
     "선생님, 묘안이 있습니다. 토지문서를 위조하면 경우에 따라 기백원의 기금을 마련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실로 기상천외의 묘안이었다.
     이에 곁들여 목포에 거류하는 일본인 가운데 마쓰다(松田)라는 잡곡상이 있어 해마다 추수 때가 되면 제주에서 생산되는 콩을 구입하기 위해 자주 드나드는 관계로 신현범과는 상거래의 인연을 맺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쯤되니 일은 급진전됐다.
     당시 도내에서 토지의 법정가격이 가장 높은 구우면의 토지대장을 열람하고 최상전으로 짐작되는 토지 수필을 등본한 후 면장 직인을 위조하여 소유자 인감증명을 만들고 소유권 등기문서를 위조한 다음 목포에 있는 일본상인 마쓰다에게 위조문서를 저당하여 탈출자금을 마련하자는 계획이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비정상적인 방법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이틀도 안되어 문제의 토지문서는 김창언의 손에 의해 감쪽같이 만들어졌고 곧 신현범에게 건네져 안주머니 깊숙이 간직되었다.
     장도를 비는 동지들을 뒤로 하고 최정식과 신현범이 연락선을 타고 제주를 떠난 것은 그해 7월 16일이었다.
     두 사람은 허름한 양복으로 변장하여 시골 장사아치의 행색이었다.
     김치택은 검문망을 피하기 위해 이틀 앞당겨 목포에 가 있었으며 두 사람이 도착하는대로 합류한다는 약속이 돼 있었다.
     그날 밤 목포에 닿은 두 사람은 삼엄한 검문망을 무사히 벗어나 김치택과 만나기로 했던 장소로 달려갔다.
     선착장에서 벗어난 으슥한 부둣가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예상밖의 사태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사람과 만난 김치택은 제주에서의 비밀조직을 냄새 맡은 일경이 주모자 색출에 혈안이 된 나머지 이곳에까지 손을 뻗히고 있을뿐더러 일인 상인 마쓰다란 자가 요 며칠 사이 목포경찰서 출입이 잦은 점으로 미루어 토지문서 위조 간계가 발각될지도 모른다는 놀라운 정보였다.
     이틀 앞서 목포에 왔던 김치택은 마쓰다와 만나 토지거래관계를 교섭해 둔다는 소임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다면 자기들이 목포까지 오는 동안 형사들이 미행했을 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아닌가.
     미행하면서도 체포하지 않은 것은 계속 동정을 살펴 결정적 증거를 잡기 위한 고등술책임이 분명하다.
     판단이 여기에 미치자 일은 이미 어긋났다는 것을 직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6) 검거선풍(檢擧旋風)

     이 마당에 상해로 탈출하기 위한 계획을 강행한다는 것은 마른 잎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는 무모한 일이다.
     일단 별도 행동을 취하기로 하고 김치택과 헤어진 두 사람은 자신들의 안위보다 먼저 제주에 있는 김창규, 조봉호 등 남아있는 동지들의 신변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위기를 알려 동지들을 먼저 구출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차선책을 세우자. > 그런 결심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말할 수 없는 고역을 치렀던 신현범(77년 2월 작고)은 당시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 한창때라 일본형사 한두놈쯤 때려눕히고 안전지대로 피신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신상의 안위보다 남아있는 동지들을 생각할 때 나 혼자 살기 위한 비겁한 행동을 취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공생공사하기로 굳게 맹약한 사이였다. 최정식과 헤어진 나는 일경의 동정을 더욱 살필 목적으로 유달산에 숨어들어 숲속에서 가마니를 깔아 사흘을 보냈다. 그 사이 나는 입고 있던 양복을 벗어던져 허름한 한복으로 갈아 입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농군모자를, 발에는 게다를 신고 있었다.................』
     변장한 신현범은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몸에 지니고 있던 토지위조문서를 땅에 파묻고 다시 제주로 오는 배를 타기 위해 부두로 나오다 형사의 불심검문에 걸려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즉시 목포경찰서로 끌려갔다.
     "목포에는 뭣하러 왔어. 같이 온 사람은 누구며 행선지는 어디야?"
     곧 잡아 삼킬 듯한 그들의 호령에 신현범의 대답은 너무나 명료했다.
     "어물장사나 해먹고 사는 촌놈이 무엇을 합니까. 영동(榮洞에)서 건어 도매상을 하는 김재식(金在植)에게 물건을 위탁한 대금이 17원 받을 것이 있어 그것을 찾으러 왔던 길입니다."
     건어도매상 김재식은 누구였나.
     1920년대 이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하면서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하는데 큰 영향력을 줬던 제주가 낳은 인물 김명식의 바로 친형이었다.
     김재식은 목포 일대에서 널리 알려진 대상으로 비록 장사를 했으나 비범한 인품의 소유자여서 일인들도 함부로 넘보지 못하는 존재였다.
     아무리 독사같은 일경이라 하더라도 피의사실에 대한 증거가 없는데 더 붙들어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들의 속셈은 제주에서의 항일조직을 뿌리 채 검거하기 위해서는 미끼를 풀어주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했는지 모른다. 조회결과 신현범이 진술한 여행목적은 거짓임이 드러났으나 현지 경찰은 그를 놓아 주었던 것이다.
     신현범이 다시 제주에 돌아온 것은 7월 19일 오후였다.
     최정식은 다른 배를 이용하여 같은 날에 귀가하고 있었다.
     다시 신현범의 증언을 옮긴다.
     『그날따라 마침 두 척의 배가 떠나게 되어 최정식과 나는 서로 만나지도 못한 체 제주에 돌아왔다. 나는 집으로 가는 것보다 몸을 숨길 목적으로 친구가 있는 이도리(二徒里) 사무소에 가서 자고 최정식은 겁도 없이 자기 집에 갔던 것같다.
우리가 체포된 것은 여름해가 뜨기 전인 이튿날 새벽이었다.』
     1919년 7월 20일. 그날은 독립희생회 제주지부 회원들에게 있어 가장 불길한 날이었다.
     제주서에 연행된 신현범은 소의 신으로 만들어진 채찍(속칭 쇠좃매)으로 사정없이 두들겨 맞는 곤욕을 치뤘고 고통을 견디기 위한 수단으로 등을 구부리면 양손을 묶어 천장에 매다는 등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비인도적인 고문을 당해야 했다.
     신현범은 밀려오는 졸음을 물리칠 수 없어 그 생지옥 같은 고문현장에서 대롱대롱 천정에 매달린 채 잠을 자기까지 했다.
     한편 최정식은 끌려간지 몇 시간이 지나도록 문초를 받지 않았다.
     방심한 그는 그때까지 안주머니 속에 간직해 두었던 상해임시정부로 보내는 독립희생회의 비밀문서를 몰래 꺼내 물을 끓이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아궁이의 잿더미 속에 묻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었다.
     그날 저녁 늦청소를하던 청소부가 문제의 문서를 발견. 수상히 여긴 나머지 취조주임에게 갖다 바치고 말았다.
     이것은 일경의 입장에서 캐기 위해 천금이나 다름없는 중대정보였다.
     독립희생회의 비밀을 캐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던 제주경찰이 발칵 뒤집혔다.
     총비상령이 내려졌다.
     그날밤 서부교회에서 조봉호가 체포된 뒤를 이어 전도에 걸친 비상망 속에서 관련자 검거선풍이 밀어닥쳤다.
     그로부터 사흘 동안 검속된 인사는 이미 끌려와 문초를 받고 있던 신현범, 최정식, 조봉호를 비롯 김창국, 김창언, 윤식명, 윤정찬, 문창래, 홍기철, 이도종, 문창숙 등 40여명에 이르렀다.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군대양성을 지원할 목적으로 모금운동에 나섰던 애국지사들은 정치변혁을 시도하고 안녕질서를 방해했다 하여 정사범(政事犯) 및 출판법 위반이라는 어마어마한 죄목이 씌워진 가운데 갖은 문초와 형언하기 어려운 고문을 당해야 했다.

(7) 거룩한 동지애
     
     다행히 독립희생회의 연락원 김창규는 체포령이 내려진 그날 성산포로 잠입한 후 선객을 가장하여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고 무사히 탈출에 성공. 망명길에 올랐다.
     이 지방 일제탄압의 아성인 제주경찰서는 끌려간 애국지사들에 대한 고문과 고통을 참으려는 처절한 비명으로 아비규환의 생지옥을 방불케 했다.
     사태가 돌이킬 수 없이 확대되자 조봉호는 자기 한 몸을 희생하여 동지들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없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살신성인의 숭고한 길을 택하는 것만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이요 더 나아가 순국의 큰 뜻을 펴는 길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사색은 고민으로 변했고 고민은 번민으로 바뀌어갔다.
     '그렇다. 나 개인을 희생하여 국권을 찾는데 밑거름이 되는 것이 독립희생회의 참뜻이 아니냐. 많은 동지들을 구하기 위해 나 혼자서 모든 책임을 지리라.'
     이제 그의 결심은 섰다.
     검거된 지 1주일이 지나자 일경의 야만적인 고문은 극에 달했다.
     이 무렵 조봉호는 다른 감방에 갇혀 있는 동지들에게 인통하여 사건의 모든 책임은 자기에게 있고 나머지 동지들은 그에 따랐을 뿐이니 모든 것을 자기에게 전가시켜 주도록 간곡히 당부해두었다.
     그로부터 조봉호에게 가해진 고문은 필설로 형언할 수 없으리 만치 혹독한 것이었다. 팔을 뒤로 묶어 그 사이에 각목을 집어넣고 쥐어트는 행위를 비롯, 발목을 묶어 거꾸로 천정에 매단 다음 코에 물을 붓는 금수나 다름없는 물고문까지 자행했다. 기절하면 물을 끼얹어 의식을 다시 찾게 하고 배후를 대라고 얼러댔다. 그것은 인간의 소행이 아니라 차라리 마귀의 장난이었다. 그럴때마다 어렴풋이 정신이 들면 조봉호는 이렇게 외쳤다.
     "망국의 백성으로 나라를 찾기 위해 일어선 독립운동이 어찌 죄가 되겠느냐. 나혼자의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을 실천했을 뿐 배후도 없고 더구나 주모자가 따로 있을 수 없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질 뿐이다."
     그러나 임시정부선포문과 해외통신문을 증거물로 손아귀에 쥔 일경이 죽음을 각오한 조봉호의 항변만으로 물러설 리 만무했다.
     사태의 경과과정으로 보아 현지에서 원문을 복사한 것이 틀림없고 많은 수량이 전도에 배포된 점으로 미루어 조직적으로 행동한 아지트가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형사진을 풀어 조봉호를 비롯한 김창국, 최정식, 김창언 등 비교적 주동의 혐의가 짙은 사람들에 대해 신상조사를 철저히 하라고 이르고 3월 이후의 일상생활과 거동을 빠짐없이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고통과 시련으로 얼룩진 7월은 가고 다시 8월이 찾아 들었다.
     그달 초순의 어느 날이었다. 사냥개처럼 쏴다니던 형사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들더니 고등계 주임 앞에 '중대 정보 있음'을 보고했다.
     "뭐야! 역시 그랬군."
     무릎을 탁친 주임이 제일먼저 호출한 사람은 최정식이었다.
     "임마, 속아 넘어갈 줄 알았나. 너희집 안방에서 불온문서를 등사했지. 몇 장이나 했어?"
     호통과 동시에 어느새 그의 탁상 위에는 자기 손으로 직접 등사한 임시정부선포문과 해외통신문이 증거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닌가.
     "다 털어 놓으마. 나와 조봉호 두사람이 3백매를 등사하여 150매씩 나눈 후 전도를 돌며 배포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최정식은 독립희생회의 배후가 누구며 군자금은 누가 대고 등사판은 어디서 구했는가에 대해서는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일체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김창국 목사는 그들의 심문에 이렇게 답변했다.
     "5월 하순 조봉호가 나를 찾아와 우리 임시정부가 상해에 수립되어 독립운동을 하고 있음으로 우리 한국인은 이를 원조하기 위하여 금전을 내어야 한다고 하므로 나는 이에 찬동하여 신도들에게 그 뜻을 전하였으며 또 신도들로부터 모금하여 달라는 부탁을 받아 7월 중순까지 모금한 바 있다."

(8) 살신성인의 길

     이 무렵 일제는 거족적으로 일어났던 3·1만세운동에 자극받아 10년 가까이 떠벌려 오던 무단정치를 지양하고 이른 바 '문화정치(文化政治)'를 표방하려 하고 있었다. 식민지 정책의 근본적인 전환은 특히 종교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
     모든 한국인을 신앙에 물들게 하여 사상적인 각성과 정치활동을 둔화시키기 위한 소위 '우민정책(愚民政策)'이 그것이었다.
     그런 만큼 종교인에 대한 대접은 어느 정도 관대했다고 할 수 있다.
     독립기금사건에 대한 배후를 캐기 위해 일경이 상투적으로 써온 혹독한 고문은 어느 관련자를 막론하고 대동소이한 것이었으나 취조과정에서 조작극을 꾸미거나 함정에 빠뜨리는 일은 별로 없었다.
     이것이 김창국, 윤식명, 윤정찬, 이도종 목사에 대한 그들의 대접이었다. 그러나 김창언에 대한 취조는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자비한 고문이 만 하룻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나는 평소 조봉호를 존경했고 최정식과는 지기지간이다. 맺어온 의리를 지키기 위해 그들이 하는 일을 도왔을 뿐이다. 내게는 딴 뜻이 없다."
     희미해가는 의식속에서도 김창언은 그 말을 되풀이 할 뿐 더 이상의 거사 내용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불행중 다행이랄까.
     아니면 세계적인 최강을 자랑하는 그들의 정보망에 구멍이 뚫린 탓이었을까. 최정식과 김창국이 그 해 3월 24일 조천만세 운동에 호응하여 제주면에서도 대대적인 시위운동을 벌이려던 거사계획과 김창언이 법원지청에서 등사판을 빼낸 사건은 까마득히 모른채 지나쳤던 것이다.
     이밖에 문창래에 대한 심문조서는 조봉호 가주장한 독립희생회의 취지에 찬동하여 문창숙을 비롯한 수명으로부터 군자금 헌금을 권유한 후 돈을 받아내어 조봉호에게 수교하므로써 안녕질서를 방해했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불더위속에서 진행된 검속자들에 대한 취조심문은 약 50일 동안이나 이어졌다.
     이들에게는 사식은 물론 가족면회까지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독립희생회 관련자들이 구속기소된 것은 검속된 지 50여일만인 그해 9월 11일이었다. 조봉호, 최정식 등 주동자를 포함하여 모두 26명이었다. 보름 후인 9월 25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개정된 「정사범 및 출판물 위반사건」에 대한 언도공판은 각계에서 몰려온 방청객들로 초만원을 이루다시피했다.
     방청석의 이목은 조봉호의 늠름한 기상과 열화같은 애국심. 그리고 청년지사 최정식의 굽힐 줄 모르는 지조에 쏠렸다.
     재판장의 질문에 두 사람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망국의 백성으로서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우리 두사람이 주동하여 실천했을 뿐 다른 동지들에게는 아무 죄가 없다."
     같이 기소된 동지들은 그 투철한 희생정신과 숭고한 동지애에 감동하여 목이 메일뿐 아무 말이 없었다.
     첫 언도공판에서 주어진 형량은 최정식 징역 3년, 조봉호 징역 2년, 문창래 징역 6월이었다. 그대신 일제가 관대한 처분을 내렸음인가.
     나머지 동지들은 선고유예 처분을 받아 세 사람을 남겨둔 채 석방되는 몸이 되었다. 비록 '정사범'이라는 무거운 죄목이 씌워져 영어의 몸이 됐을망정  최정식, 조봉호, 문창래는 자신의 희생으로 많은 동지를 구할 수 있었다는 뿌듯한 보람과 감격에 몸둘 바를 몰랐다.
     가족들의 끈질긴 권유에 따라 세 사람이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한 것은 그해 10월 중순이었다.
     곧이어 대구로 호송된 세 사람은 11월 12일 대구복심법원 제2부 법정에서 조선총독부 판사 마에사와(前澤)를 재판장으로 한 마쓰시다(松下) 등 3명이 배석한 가운데 심리한 결과 항소 사실에 이유가 있다고 인정되어 형량이 각각 감소되었다.
     확정판결은 최정식 1년 6월, 조봉호 1년, 문창래는 무죄였다.
     결심공판에 제시된 증거품은 임시정부선포문과 해외통신문이었다.
     원심을 파기한 대구복심법원의 판결문은 다음과 같았다.

     『.............피고인들의 진술과 증거물을 조회하여 볼 때 피고 최정식과 조봉호는 허가를 받지 않고 국헌에 위배되는 문서를 인쇄한 행위는 융희 3년 법률 제6호, 출판법 제11조 제1·2항에 해당되며 이를 반포한 행위는 동법 제1조 제1항 및 제11조 제1항 1호에 해당된다.........피고 문창래는 피고 조봉호가 주창하는 독립희생회의 취지에 찬동하여 문창숙 등을 권유하여 출금토록 한 후 이를 조봉호에게 교부함으로써 안녕질서를 방해하였다는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빙이 불충분하므로 형사소송법 제 224조에 입각하여 이를 무죄언도한다................』
     그들이 압제의 도구로 사용한 형법조문의 제령(制令) 따위를 더 열거해서 무엇하겟는가.

(9) 옥사순국(獄死殉國)

     무죄방면되어 고향에 돌아온 문창래는 최정식, 조봉호 두 사람의 그 간절한 동지애와 열화 같은 애국심을 모든 동지들에게 전하여 주며 다시 한번 통곡하고 감격해 마지 않았다.
     그러나 조봉호가 받은 육신의 고통은 너무나 컸다.
     제주서에 구금됐을 때 다른 동지들을 살리기 위하여 무거운 책임을 혼자졌던 조봉호는 대구에 호송된 후에도 몇 갑절되는 혹독한 고문을 이겨내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서슬은 시퍼랬다.
     "이놈들 두고봐라. 정의의 불벼락이 언젠가는 너희들 머리 위에 퍼부어져 심판을 내릴 날이 있을 것이다. 세계의 열강들이 우리의 독립을 지원하고 있다. 우리 임시정부에서 양성하고 있는 독립군이 자그마치 6백만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아느냐."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으름장이라기보다 불호령이었다. 그럴 때마다 일경의 고문은 더욱 가혹했다.
     조봉호는 살아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굳은 의지와 애국혼으로 다져진 지사의 육신일망정 인간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헌칠한 키에 뛰어난 용모였던 조봉호의 모습은 날이 갈수록 여위어갔다.
     초창기 이 지방 기독교계에 선구적 역할을 했고 큰일을 도모한 후 동지들을 살리기 위해 자진의 모든 책임을 일신에 졌던 지사 조봉호는 그들의 국경일인 '천장절'을 보기 싫다는 듯 그날을 하루 앞둔 1920년 4월 28일 대구형무소 제17호 감방에서 망국의 한을 안은 채 38세의 젊은 나이로 쓸쓸히 눈을 감아 운명했다.
     영화도 안일도 헌신짝처럼 내던져 구국의 일념으로 순국한 거룩한 죽음이었다.
     한편 최정식은 옥중에서 존경하는 선배이며 동지인 조봉호와 사별한 후 형기를 무사히 마쳐 출감하였다.
     그러나 제2의 고향인 제주에 돌아온 그에게는 또다른 비보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최학서가 아들의 투옥으로 말미암아 심화병으로 거동을 못한데 겹쳐 일경의 탄압이 날로 가중되는 바람에 최정식의 출감 두 달을 앞두고 세상을 떠난 것이 그것이다.
     아들의 귀향을 못보고 타계한 최학서의 유해는 교회 사람들의 손으로 제주성 밖 별도봉에 안장되어 있었다.
     김창국 목사와 같이 부친의 묘소를 찾은 최정식은 엎드려 불효를 빌며 땅을 쳐 통곡했다.
     그후 최정식은 선친이 경영하던 유기상회마저 문을 닫는 파산을 맞아 제주에서의 설 땅을 잃었고 악착같이 따라다니는 일경의 감시에 견딜수 없어 고향인 전북 삼례로 돌아갔으나 그곳에서도 탄압은 그치지 않아 각처를 전전하며 고난의 세월을 이어야 했다.
     최정식의 독립운동 공적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독립지사 발굴사업에 나섰던 전북일보가 그의 행적을 쫓은 끝에 처음으로 취재보도한 1972년 부터였다.
     그는 제주에서의 독립희생회 관련자 중 유일한 생존자로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단칸방에서 어려운 여생을 보내었다.
     지사 조봉호의 높은 뜻과 공적이 처음으로 인정된 것은 그가 순국한 지 꼭 43년째가 되는 1963년이었다.
     그해 3월 1일 3·1절을 맞아 정부는 조봉호지사에게 건국공로대통령표창을 수여하여 숭고한 애국정신과 공로를 높이 기렸다. 지금 사라봉 기슭 모충사에는 제주 의병탑, 김만덕 의녀(義女) 추모비와 나란히 그의 추모비가 세워져 이 지방 충절의 귀감으로 길이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지사의 유해는 일제가 어떻게 처리했는지 영영 가족의 품에 돌아오지 않았다.
     더욱 비통에 젖은 가족들은 유해나마 모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지사 조봉호의 유족으로 며느리 이응종(李應從)과 손자 태신(泰信)이 애월읍 금성리 그의 고향에서 긍지를 키우며 지금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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