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씨는 한림읍 귀덕리 사람으로 김광삼(金光三)의 처이다. 시집을 와서 6년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갑자기 남편이 죽음에 애통하여 따라 죽고자 하였으나 늙은 시부모가 계셨으므로 마음을 고쳐먹고 정성을 다하여 시부모를 봉양하였다. 그 후 돌아가시자 장례를 극진히 치르고 제사 때는 시아버지가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을 마련하여 지내었다. 한해 기일에는 제찬(祭粲)을 구하지 못하여 걱정하며 돌아다니더니 갑자기 길목에서 매가 꿩을 치어 떨어뜨리니 마을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효성이 지극한 소치라 하여 효부로 천거하니 1822년(순조 22년) 정려 복호되었다. 이 효부비는 한림읍 귀덕리에 있으며 비석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學生金光三妻 孝烈崔氏之閭(학생김광삼처 효열최씨지려)
비의 규모는 너비 42㎝, 높이 76㎝, 두께 15㎝이며,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 【최씨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시집 온 지 6년에 종득(鍾得)·종언(鍾彦) 두 아들을 두었으나 면의(免依)에 미치지 못하여 남편이 갑자기 죽으니 슬퍼함이 제도에 지나쳤고, 시부모가 계셨으므로 효도와 봉양을 더욱 돈독히 하였다. 시부모가 돌아가시자 예제(禮制)를 극진히 하였으며, 시아버지의 기일에는 찬감을 마련하지 못하여 마음이 답답하였으나 물을 길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매가 꿩을 치어 갑자기 신 앞에 떨어뜨리므로 잡아서 조전(助奠)하니, 마을 사람들이 다 효성이 지극한 소치라 하였다. 지난 도광(道光) 임오(壬午), 즉 순조 22년(1822)에 어사가 그 탁행(卓行)을 가상히 여겨 완문(完文)을 내려 보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그 자취가 사라져 없어질까 염려되어 이에 도설(棹楔)을 세운다.】고 하였다. 비석의 건립연대는 미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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