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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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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마을지명
작성자 관리자 조회 2,192 회

 

동해물 : '동해물'은 지난 날 첨장 벼슬을 하였던 이씨 성을 가진 자가 귀향와서 살면서 이 곳에서 나는 물을 이용해 논을 만들었다고 하여 이 물을 '이첨장물'이라고도 하는데, '동해물'이라고도 부른다.


섯정도 : 서쪽에 있는 마을 입구이다. 목장 안으로 드나드는 '정낭'이 설치된 길목을 두고 정도라고 한다.


망밧 : 서당 남쪽에 있다. 왜적 침입에 대비하여 망을 보던 동산이며 '마희천 연대'가 있었던 곳이다. 


앞물 : 앞쪽에서 물이 나기 때문이며, 4·3사건 이전까지 사람들이 거주하였다.


청케 : 강정에서 논농사 짓기가 가장 좋은 곳이기 때문에 '청캐일답'이라고도 하며, 선사시대 유물들이 출토가 되기도 한다.

연대 : 강정동 2505번지 일대를 속칭 곳물연대라고 부르는데 이곳이 변수연대(邊水煙臺) 터전이라 보아진다.
여기서 외선(外船)을 발견하면 밤에는 봉화로 낮에는 연기로써 동은 정의연동으로 서는 희천(希川)으로, 희천에서는 다시 대포연대로 연락하여 전 도민이 방위태세를 갖추었다.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외적을 막아내고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자위의 의지가 서려 있는 곳이다.


대궐터 : 강정동 4264번지 전(田)을 옛부터 대궐터라 불러오고 있다. 이곳에서는 궁궐주춧돌의 유편(遺片)으로 보아지는 대리석 조각과 기와 조각이 지금도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옛 가래현(加來縣) 당시 현청사(縣廳舍)가 지어졌던 곳이라 보아진다.

옥도루 : 강정동 4263번지 전(田)을 옥다루라고 불러오고 있다. 이곳은 가래현 당시 감옥소가 있었던 장소가 아닌가 보아진다. 대궐터의 바로 앞에 있으며, 이곳에서도 이 지방에서 나오지 않는 대리석 조각과 기와 조각이 오늘날 발견되어 지고 있다.

장구밭(裝龜田, 장구왓 : 강정동의 속칭 대궐터와 옥다루가 있는 지경(地境)을 장구밭이라 부른다. 「재정군지(大靜君誌)」에는 이곳에 궁궐유지(宮厥遺址)와 뢰옥유지(牢獄遺址)가 있다고 적혀 있는데, 궁궐유지는 대궐터요, 뢰옥유지는 옥다루를 지칭한 것으로 보아진다.
강정동의 여러 지경중에서도 이 장구밭이 가장 역사가 깊은 유적지인 듯 하나, 지금은 기와조각 등 약간의 유편이 발견될 뿐 그에 관한 아무런 역사적 기록도 찾아볼 수 없으니 실로 안타까울 뿐이다.


쏠대밭 : 현 강정초등학교 동남쪽 약 500m 지점에 있는 강정동 4460번지 전(田)을 솔대밭이라 부르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즉, 지금부터 약 80여년전 강정마을에서 많이 사육하던 소들이 전염병으로 인하여 몰사한 일이 있었고, 그 후에는 강정동의 너븐밭 동네에는 소병이 자주 발생했었다고 한다.
그 당시 풍수를 보는 어느 분이 마을의 이러한 가축재해는 범섬이 부락을 쳐다보는 형세이므로 그것을 막기 위하여 명당앞에 쏠대를 세워놓아야 한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한라산에서 산유자 나무를 베어다 50m 간격의 3각지점에 세워놓았는데 이때 한 쏠대는 사장밭에서 옮겨 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다시 북허터(지금 굴왓동네)에도 10여세대의 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명당앞에 세워진 쏠대가 보기 흉하다하여 이 동네 사람들이 한밤중에 그 쏠대들을 뽑아버리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다.
그리하여 두 동네 주민들 사이에 옥신각신 다투다가 다시 쏠대를 제자리에 세우게 되었는데, 그후 오랜 세월의 풍상(風霜)으로 지금은 쏠대없는 쏠대밭만 남아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재해에 공동으로 대처하던 조상들의 협동정신과 공동운명체적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켓담 : 옛부터 제주도의 산간지역에서는 많은 우마(牛馬)들을 방목했었다. 그런데 산간에 방목되는 우마들이 가을과 겨울철에는 해변마을인 강정리에 까지 내려와 마을 주민들이 가꾸어 놓은 농작물들을 먹어 버리는 등 방목우마로 인한 농작물 피해가 심하여 마을 주민들이 편히 살 수가 없었다. 이러한 주민들의 곤경을 해소하기 위하여 지금으로 부터 약 180여년 전 당시 경민장(현 里長織)이던 윤신채(尹信彩)의 지혜와 지도로, 강정리의 북쪽 지경 일선에 돌담으로 축성(築城)하였으니 이것이 속칭 강정 켓담이다.
방목 우마들이 마을안에 들어오지 못 하도록 하기 위하여 만든 이 켓담은 북서편으로는 월평리와의 경계선에서부터 북동편으로는 난정이도까지 약 3㎞에 이르는데 구명물길, 말길, 난정이도라고 불리는 주요 삼통로에는 정주먹(제주도 특유의 대문 구실을 했던 정낭을 받치는 돌)을 세워놓고 정낭을 놓았는데, 이를 각각 서정도, 동정도, 난정이도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켓담의 안쪽에서는 주민들이 우마를 방목할 수 없으며 반드시 우마에 줄을 메어 기르기로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놋그릇,  식기 등을 마을에 바치기로 향약(鄕約)으로 정한 후, 윤신채 스스로 가축을 야간에 풀어 놓았다가 놋그릇을 마을에 내놓은 시범을 보였다고 한다. 그 후 강정 마을에서는 가축으로 인하여 농작물 피해를 입는 일이 없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4·3사건 당시, 켓담에 쌓아졌던 돌담들이 마을 방어 축성자재로 쓰이면서 켓담은 허물어졌고 서정도, 동정도, 난정이도에 세워졌던 정주먹도 포대 어귓돌로 사용하기 위해 옮겨져 버려 현재 강정 켓담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팔소장 : 현 강정 공동목장 속칭 참송이케가 팔소장 자리이다. 이곳은 옛날 나라에 바칠 국마(國馬)를 사육하던 곳이다. 옛부터 제주도에는 수많은 말과 소가 사육되었는데, 이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이원진(李元鎭) 편 「탐라지(耽羅志)」 (1653년 간행)에는 당시 제주목(濟州牧)에 마장(馬場)이 7소(所) 38자, 6450필(匹)의 말이 있었고, 정의현에 마장이 3장(場) 17자, 2383필의 말이 있었으며, 대정현에 마장이 1장(場) 3자, 1552필의 말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김석익(金錫翼) 저 「탐라기년(耽羅紀年)」 (1918년 간행)에는 이조 숙종 30년 (1740년) 목사(牧使) 송정규(宋廷奎)가 조정(朝廷)에 계청(啓請)하여 목장(牧場)을 축(築)함에 20소(所) 60둔(屯)을 합하여 10소로 정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13세기 후반 원(元)나라의 지배하에서 제주도에 우마(牛馬)가 방목되기 시작한 이래, 17시기의 전반기에는 제주도 전역에 11개의 목마장(牧馬場)이, 그 후반기에는 20개의 목마장이 있었다가, 18세시에 이르러서는 축장(築墻)된 목마장이 10개소로 되었던 것 같다.
그 중 1, 2, 3, 4, 5, 6소(所)는 제주목(濟州牧)에 속하게 하고 7, 8, 9, 10소(所)는 대정·정의 양현(兩縣)에 속하게 하였었다는데, 8소장(八所場)이 바로 현 강정 공동목장자리였다고 한다.
당시 팔소장은 주위 30마리요, 마감(馬監) 2인, 군두(群頭) 2인, 목자(牧子) 24명이었으며, 둔마수(屯馬數)는 190여필이나 되었다고 한다.

몰길 : 팔소장에서 강정포구까지 이어진 직선도로이다. 옛날 팔소장에서 기르는 말들에게 강정동 속칭 정의놀깍물(下流)을 먹이는데 이 길을 이용했기 때문에 말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당시에 강정리의 고씨(高氏)댁에서도 수백마리의 말떼를 기르면서 이 길을 이용하여 이 말길에는 말의 통행이 끊어진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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