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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마을약사

평대리의 설촌과 역사

평대리의 설촌유래와 지명유래

평대리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입주하여 살기 시작했으며, 언제 설촌이 되었는지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검서굴왓'에서 선주민들의 삶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고, 환해장성터가 남아 있으며, '수데기당 본풀이'를 조사해 보면 송당과의 연관성이 나타나는 등 설촌 이전의 거주상황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덧붙여서 구전되기도 하는 각 집안의 평대리 입향시조들의 입향년대와 주거지 등을 조사해 보면서 마을의 설촌유래를 더듬어 보도록 한다. 물론 자료의 부족으로 정확히는 규명할 수 없으리라. 부족한 부분은 더 많은 사료의 발굴과 고증으로 보완해 나갈 것을 아울러 기대해 본다.

설촌유래

가. 본향당신의 좌정으로 본 거주설

평대리는 송당리와 인접해 있는 자연부락이므로 선사시대의 송당신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으리라는 사실은 쉬 짐작할 수 있겠다. 어는 당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당은 설촌 조상과 관련이 있고, 자손이 가지가지 송이송이 번성하게 도면, 이웃 마을로 가지 갈라가서, 새로운 마을과 본향당이 생기는 것"이므로, 당의 이전과 그 가지당과 본향당과의 관계를 설촌과 관련지워 살펴볼 수 있다.
평대리에 본향당으로는 '수데기당'이 있다. 당의 본풀이는 정확히 남아 있지 않지만 수데기당의 남신인 '신선백관'은 송당신의 8째, 혹은 9쨰 아들이라고 마을에서는 이야기하고 있다. 그럼 수데기당의 본풀이는 남아 있지 않지만 마을에서 이야기하는대로 대충 살펴보면,
"수데기당의 남신인 신선백관(혹은 신선또)은 송당신의 8째, 혹은 9째 아들로 토착신이고, 수데기할망은 외방신이라, 하루는 강원도(혹은 철산도)에서 살던 수데기할망이 외롭게 사는 신선백관을 찾아가서 결혼을 해가지고 딸을 일곱 낳고 사는데, 그러다보니 돼지고기가 먹고 싶어졌어
돼지고기가 먹고 싶으니, 여기엔 두 가지 설이 있어. 하나는 돼지 발자국에 고인 물을 빨대로 빨아 먹었다는 거, 또 하나는 돼지고기가 먹고 싶다 보니 콧구멍으로 돼지털이 들어갔다는 거라.
그러자 신선백관을 노랑내가 난다, 놀핏내가 난다, 살림을 분산하자. 그래서 땅 가르고, 물 갈라서 가름밭 밖으로 내쳐버리니 수데기할망은 한동 지경으로 떨어져서 살게 된 거라. 그리고 신선백관은 맑고 맑은 신이니 심방집으로 모셨어. 그러다 작년인가부터 수데기당으로 모신 할망 옆에 하루방을 같이 모시고 제를 올리고 있지."
그리고 신선백관의 제일은 3, 13, 23일(그리고 2월8일, 7월8일, 8일은 일반적으로 심방집 제일이다. 이는 신선백관을 수데기당에 모시기 전 심방집에 모셨을 때 제일인데 당으로 모신 후에도 이 날짜에 제를 올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이고, 수데기할망의 제일은 7, 17, 27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평대리의 설촌이 송당과 관계가 있다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은 신서백관이 송당신의 8째, 혹은 9째 아들이라는 사실과 제일이 3, 13, 23일이라는 말은 송당신의 아들들의 제일이 모두 같은 날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수데기당은 송당신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된다는 것인데, 결국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볼 때 평대리는 송당의 설촌보다 조금 늦은 시기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원래 제주도 당신화의 발상지로 알려지고 있는 송당에는 현재 '웃손당(上松堂)'에 백주할망이, '알손당(下松堂)'에 소천국이 좌정해 있다. 이 부신과 모신 사이에서 아들 18, 딸 28, 손 378손이 태어나 제주도 마을 전역에 당신으로 좌정하게 되어 오늘날까지도 각 부락마다 민간신앙공동체의 구심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송당과 어느 정도 인접해 있고, 부락 본향신으로 송당신의 아들이 좌정해 있거나, 강원도 혹은 철산도에서 들어온 외방신이 모셔져 있든지, 본풀이에 평대리의 설촌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 나온다든지 하는 마을은 설촌연대가 평대리와 어느 정도는 비슷하리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지명유래 : 평대리(벵디)

「평대」라는 마을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진 바 없다. 연로한 분들이 회고에 의하면 옛날에는 「괴벵디」라고 불렀다 하며 지금도 평대하면 「괴벵디므슬」이라고 이야기하는 村老(촌로)들이 있다고 한다.
지금은 폐동되어 없어졌지만 평대리 脫田洞(탈전동;탈밭동네)과 한동리 防築洞(방축동;방추굴)이 이웃하고 있었든 것으로 추측하건데 평대(벵디)와 한동(괴)을 하나의 마을 단위로 묶어 지방 관헌들이 다스리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 후 인구 증가와 산업이 점차 발달하여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다스리기 어렵게 되자 한동리 상동(웃한동)과 하동(알한동)을 「괴벵디」에서 분리하여 한동리로 하고 방축동을 포함하는 현 평대구역을 묶어 「벵디」로 하는 두 개의 마을로 구분하지 않았나 한다.
그런데 「벵디」가 「평대」로 변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평평한 들판이라는 「벵디」의 어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며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일합방 후 일제 식민지정책으로 실시된 토지조사(서부측량)와 병행하여, 행정구역 통폐합 조치를 취하게 되었는데 이때 평대리에 속한 방축동을 한동리로 병합시킴으로 현재의 행정구역이 확정되었다.(1914년)
평대리의 "대"字가 坪代에서 坪岱로 그리고 坪岱에서 坪垈로 변했다가 다시 坪岱로 환원되었는데 어떠한 연유로 언제 변경되었는지 아직까지 확실하게 조사되지 않고 있는데 선인들이 남겨 놓은 단편적인 기록을 중심으로 유추해 볼 수밖에 없다. 
李英石(이영석)씨 소장 古文書 "咸豊二年壬子四月初五日李 賢處明文(함풍이년임자사월초오일이길현처명문)"(1852년 작성)을 보면 당시 마을 대표인 警民長(경민장)이 직인을 날인하였는데 「坪代」로 마을이름이 표기되어 있고 그 5년 후인 1857년 작성문서 "咸豊七年丁巳十二月初壹日康召史處明文(함풍칠년정사십이월초일일강소사처명문)"에도 「坪代」로 직인이 날인되어 있으며, 1865년 작성문서"同治三年甲子八月十五日長女處葉作記(동치삼년갑자팔월십오일장녀호엽작기)"에도 "坪代"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860년대까지는 리명을 「坪代」로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874년 행정구역 정비시 「左面」을 구좌면과 신좌면으로 분리하면서, 「동복리에서 연평리까지 14개리를 구좌면으로 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거기에 표기된 리명에는 「坪岱」로 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고종 27년 기록에 평대리 출신 金致日(김치일)이 고기잡이 하다가 태풍을 만나 표류하던 중 일본배에 구조되어 조선관헌에게 인계하는 내용이 있는데 소개하면,

"其漂風綠田, 姓名居住則 船主金致日 等 九人俱以 全羅道 濟州牧 左面坪岱里居民… 中略 … 今年 七月二十一日 出漁 別坊浦 前洋 二十二日 開明 西北風 大作漂蕩大洋…"
1870년대 이후는 坪岱로 리명을 사용했음이 확인된다.
그후 1911년 작성 "토지가옥 및 교환계약서"를 보면 리장 부규창이 서명날인하고 있는데 주소에 坪岱로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조선조 말에서 일제 중반까지는 坪垈로 리명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가 1930년대 이후부터는 坪岱로 환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상 단편적인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 본 바이나 평대의 "대"자가 여러번 바뀌어진 연유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아직까지 조사가 되지 않고 있는데 언젠가는 밝혀지리라 본다.

제주도의 해변부락형성은 어느 부락이나 마찬가지로 중산간지대에서 해변인접지대로 이동되어 왔듯이 평대리도 중세에는 비자림 서쪽 지대 속칭 검석굴왓 지경에 수렵과 화전민으로 살아 왔음을 토기 기타 생활용품등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이를 고증할 수 있다.
근세에 들어오면서 수맥을 따라 또는 해산물 어획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므로서 해변방면으로 이동하게 되어 주민들이 웃가름에 이주하기에 이르렀다.
웃가름 지경에는 대지형의 밭이 있고 생활용품 잔재가 발견된다. 거금 400여년전에 주민이 정착한 것으로 추측된다.
평대리 주민정착은 거금 700년에 가까우리라 여겨지고 있다.

< 평대 >란 리명은 숙종 28년(1702) 이형상목사의 탐라순력도에 의하면 <평대 >라 표시하고 있고 예로 부터 다른 리명은 찾아볼 수 없다.
<평대 >란 리명출처는 한라영봉을 우러러보이는 평화로운 벌판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벵디〉 평대리 : 북제주군 구좌읍 지역으로 벵듸(버덩)위가 되므로 〈뱅듸〉 또는 〈坪岱〉 즉, "평평한 두둑"이라 하였는데, 평대리의 지형이 〈비자림〉아래로 드넓은 평지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평대리라 하여 1946년 북제주군에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