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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마을약사

이조 태종 16년(서기 1614년) 제주목이, 제주, 정의, 대정등 3개의 지방행정으로 분리된 후 숙종 7년(서기 1681년)에 광산김씨(光山金氏) 입도시조(入島始祖) 십이세손(十二世孫) 사형제 중 막내인 명환(鳴煥)님이 현재 표선면 토산 1리에서 본리 1599의 1번지로 전입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당시부터 '여온내'라 불렀으나 그 후 약 5년뒤 셋째인 명휘(鳴輝)님이 1599의 1번지로 입주하여 택호를 '동집'이라 불렀고 명환님은 1715번지로 입주 정착하여 택호를 '웃동집'이라 불렀다. 명환(鳴煥)님은 처첩(妻妾)을 두어 무남삼녀를 두고 오은능님을 큰 사위로 맞이하여 택호를 '웃큰집'이라 했다.
서집에 큰집은 알큰집이며 작은 할머니 사는 집은 웃큰집에 사위가 동거생활하다가 작은 할머니가 사망하고 난 후부터 가옥과 토지, 재산 일체를 상속받아 웃큰집은 사위 오씨가문이 웃큰집이 되었다. 당시 온천리에 고수동은 표선면 토산 1리에 고수동과 수도동이 합병되었으며 설촌한 할아버지 손자도 많아졌고, 타 각 성이 전입하여 백여호가 되어 마을을 이루어가니 새로 잘되어 간다는 뜻으로 리명은 신흥리로 개칭하여서 여온내는 원동, 물도왓은 고수동에 속하고 하동, 이렇게 3개동을 두어 본리가 구성되어 정장, 이사장을 두어 행정을 취급하였다.
서기 1952년 신흥 1구,2구로 개칭하여 지내오던 중 4.3사건을 당하여 서기 1948년 11월 14일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가옥과 재산을 버리고, 남원, 태흥, 신흥하동 등지로 흩어져 생활하다가 그러나 고향을 버릴 수 없다는 뜻으로 그 당시 리장 김봉관, 김희찬, 정진선, 김승삼씨가 1차 복구운동에 앞장섰다. 1년 후 복구하여 속칭 동집을 중심으로 성을 쌓아 당시 약 60호가 입주하였다. 그러나, 한라산 좌익폭도들이 주야로 부락을 침입하여 마을 주민들은 일상생활이 공포에 떨어 할 수 없이 해안부락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 후 1950년 2차 복구하여 성안이 협소함으로 북쪽으로 확장하여 약 70호 정도 입주하여 경찰파견소(지금 리사무소)를 두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경계근무(보초근무)에 임하였다. 남문, 북문, 동문, 서문 등 9개 초소를 설치하여 운영했으며, 이런 사건속에 근무중 1950년 음 1월 15일 심야에 폭도 수십명이 성내를 침입함으로 박원국 순경을 선두로 부락 협조원 대항 격투중 불행하게도 김영흥, 김두흥, 김상창, 김자윤, 김창숙, 오성언등이 순직하였고 재산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서기 1961년 신흥 1리, 2리로 개칭 분리되어 행정취급을 따로 하게 되었으며, 설촌이래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