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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마을약사

마을약사

본 마을의 설촌 연대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확실치 않으나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지금부터 약 500년전 지금의 속칭 좌랑못 부근과 신산마루 부근에 이미 산발적으로 거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귀량이터(歸梁伊基)가 있다.
그후 분산적 주거 상태가 폐허가 되고 취락구조이 현 마을은 300여 년전에 성씨, 송씨, 허씨와 그외 선조들이 입주하여 오늘이 살기 좋은 마을 형태를 이룬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마을의 발전 과정

광복 이전

중산간 마을로는 월등히 토질이 비옥하여 금비 사용이 없던 때에는 다른 마을에 비하여 농작물이 잘 자랐으며 따라서 소득도 높았었다. 사람들은 주고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농업 형태는 원시 농업 그대로 소와 쟁기로 밭을 갈고 집은 모두 초가였고, 들풀이나 나무, 곡식대 등을 연료로 사용하였다. 해안가 마을에 비하여 교통이 편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의식주를 거의 자급하는 형태의 평범한 농촌마을이었다.

광복 이후

광복과 더불어 과도기적인 현상은 이 마을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1948년 4·3사건으로 마을 전체가 소개하게 되어 해안가 마을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같은 해 11월에 폭도에 의해 마을 전체가 전소되어 글자 그래도 폐허의 마을이 되었다.
그러나 주민들의 각고 끝에 1949년 마을로 돌아와 우선 마을을 방어할 축성을 쌓았고 나무를 베어다 집을 짓는 등 마을 재건에 온 힘을 쏟게되니 마을은 가까스로 일으켰으나 주민들의 생활고는 말할 수없이 비참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폭도에 의해 소각 당하기 이전의 평화스러운 마을을 건설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여 절약 생활과 근검생활 그리고 이웃을 돌보는 인보의 정신으로 굳게 뭉쳐 생활의 향상을 위해 매진하게 되었다. 제3공화국 수립과 더불어 정부의 새마을 운동의 추진과 농어촌 진흥 정책에 힘입어 1960년을기점으로 마을에 각종 새마을 사업이 추진되었고, 또한 이와 더불어 주민의 문화 생활에도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아래와 같다.

수도(水道) : 1960년 상수도 탱크를 설치하여 마을 공용 수도시설을 하였으며, 1970년 5월 개인 상수도 시설을 하기에 이르렀다.

도로(道路) : 1962년부터 시작하여 마을 안길 3회, 외곽도로 2회 등 5회에 걸쳐 도로 확장 사업을 실시하였고, 마을 안길을 콘크리트로 포장하여 주민들의 교통에 불편을 덜어 주었다.

주택(住宅) : 지붕 개량사업을 추진하여 초가 지붕이 거의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량 되었다.

교통(交通) : 1973년 10월에 시외버스 노선이 개설되어 시외버스가 운행됨에 따라 도시와의 연결이 원활해지고 주민들의 문화생활과 자녀들의 교육에 많은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전기(電氣) : 1974년 2월 전기를 가설하여 점화되면서 주민들의 생활은 큰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다.

통신(通信) : 1975년에 행정 전화 1대가 가설되었다. 따라서 전기, 전화, 수도, 교통 등의 발달에 힘입어 비록 중산간에 위치하나 이때쯤 부터는 문화의 혜택을 어느 정도 받게 되는 마을로 변하게 되었다.

산업(産業) : 1970년대 초부터 식량작물 재배에서 탈피하여 감귤재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제 5공화국 이후

주택(住宅) : 농어촌주택 개량사업에 힘입어 초가 지붕이 전면 슬레이트, 스라브, 기와 등으로 개축 또는 신축하게 되었다.

도로(道路) : 1986년 장전∼소길간 1.35㎞가 콘크리트로 포장되었다.

통신(通信) : 1986년 개인전화 25대가 설치되었다.

마을 현황

1996년 현재 81호 가구에 남자 158명, 여자 155명이 거주하고 있다. 시외버스노선 운행, 전기·전화 가설, 수도시설 등으로 각종 문화 생활에 불편이 없고, 그리고 감귤재배 등의 영향으로 중산간 마을로는 소득이 높은 편이다. 설촌 이후 현재까지 범법자가 한 사람도 없으며 온 주민이 합심하여 복지 마을 건설에 그리고 자녀들의 교육에 혼신을 다하고 있는 모범마을이다.

※ 4·3사건의 예

1948년 4월 3일 제주도 4·3사건이 일어났다. 치안당국에서는 1948년 11월경 제주도 산간 주민을 해안마을로 분산 이주 시켰고, 한라산 폭도들의 만행으로 마을은 전소되어 황폐화되고 말았다. 그 이듬해 봄 장전, 소길, 금덕 3개 마을 리민들이 합병이 되어 장전리에 가건물(함바) 집을 짓고 공동 생활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1949년 12월경 당시 지도자이신 고치호씨가 소길리 재건을 하기 위하여 사방팔방으로 피나는 노력 끝에 다행히도 치안당국과 행정 당국의 승인을 얻어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기쁨에 넘치는 재건승인은 받았지만 소길리 주민으로서는 성곽 구축 난관이 앞을 막고 있었다. 지도자이신 고치호씨가 행정당국, 면장을 비롯하여 해안마을 책임자를 찾아서 이곳 마을사정을 말씀드리고 도움을 청해서 해안마을 주민들의 지원을 받아서 성곽은 완성이 되고 주민을 성안에 입주시켰지만 황폐된 돌담벽에 나무를 걸쳐 억새를 덮고 바닥에는 거적이나 보리짚을 깔아서 비참한 생활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주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주야로 성곽에 매달려 마을을 지켜오던중 1950년 7월 한라산 폭도들이 우리 마을에 야습해 와서 식량, 가축, 의류 등을 약탈하며 재산 피해는 물론 살생을 일삼았다. 성곽에 매달려 마을을 지키다가 적의 탄환에 맞아 장렬하게 숨져 가신 분이 고순부씨였다.
그 당시 소길리 주재 경찰 파견소 주임은 경비 불충분이라는 죄목으로 파면당했다. 1951년 7월 만 3주년이 되던 날 밤 한라산 폭도들은 2차로 우리 마을에 야습해왔으나 마을 주민과 경찰관이 혼연일체가 되어 폭도들에 대항하여 무장폭도 3명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하는데 성과를 올렸다. 그후 몇해 못가서 한라산 폭도들은 우리 아군 군경의 토벌에 의해서 전부 소탕했고, 우리 마을은 평화스럽게 살게 되었다.

역대이장

역대이장
대정팔년부터 이 장 성 명 비 고
1934. 5. 1 구 장 姜斗圭(강두규)  
1937. 9.28 구 장 左永奉(좌영봉)  
1938.10.8 구 장 白萬淑(백만수)  
1946. 3.10 구 장 高致浩(고치호) 1945.12.28 면(免)함
1948. 7.29 구 장 梁學善(양학선)  
1949. 4.16 구 장 高致浩(고치호)  
1950. 7. 1 이 장 朴明浩(박명호)  
1951. 4. 1 이 장 梁基善(양기선)  
1951.10.27 이 장 李共培(이공배)  
1952. 2.18 이 장 梁昌甫(양창보)  
1952. 7.18 이 장 白萬年(백만년)  
1952.11.29 이 장 高致浩(고치호)  
1954. 5.25 이 장 梁昌禧(양창희)  
1955. 5. 9 이 장 白允魚(백윤어)  
1957. 4.25 이 장 李共培(이공배)  
1961. 2.10 이 장 夫昌允(부창윤)  
1963. 3.31 이 장 高基孝(고기효)  
1965. 6. 1 이 장 梁順燦(양순찬)  
1968.11.15 이 장 白子春(백자춘)  
1970.10. 5 이 장 朴允式(박윤식)  
1972. 3. 9 이 장 梁應鍾(양응종)  
1974. 1. 7 이 장 高昌奉(고창봉)  
1975. 3.20 이 장 梁守烈(양수열)  
1976. 2.23 이 장 梁順滿(양순만)  
1977. 2.25 이 장 高斗玄(고두현)  
1979. 3.16 이 장 高昌奉(고창봉)  
1979.12.12 이 장 梁永善(양영선)  
1982. 3.12 이 장 梁時佑(양시우)  
1983. 2. 1 이 장 梁昌植(양창식)  
1985. 2. 5 이 장 任謹宅(임근택)  
1987.1.30 이장 임상희(任祥喜)  
1989.2.26 이장 양창계(梁昌桂)  
1992.1.10 이장 이성구(李盛久)  
1994.1.18 이장 고용진(高容珍)  
1996.1.1 이장 양창준(梁昌準)  
1998.1.1 이장 부길용(夫吉勇)  
2000.1.1 이장 임창후(任彰厚)  
2002.1.1 이장 이봉훈(李奉訓)  
2004.1.1 이장 임성보(任性普)  
2006.1.1 이장 임상언(任相彦)  
2008.1.1 이장 박근형(朴根亨)  
2010.1.1 이장 고동진(高東辰)  
2012.1.1 이장 이재관(李在琯)  
2013.4.1 이장 한홍수(韓弘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