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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마을약사

마을약사

마을연혁

제 주도지에 의하면 통은 조선조 지방 자치 조직의 가장 기초가 되는 최말단 조직으로서 부락의 5호 1통으로 연결한 인보 자치조 직으로서 제주 지방에서도 조선조 전 기간에 걸쳐 존속되었다고 적혀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수산리에서도 오가통제되었으며 부락의 장은 존위 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1675(숙종1년)년에는오가통제가 제정되어 다섯 가구중에서 지위 와 나이를 감안하여 대표인 통수 또는 통장을 선출하여 사무를 담 당케하였다. 1894년도에 부락 이장은 경민장제로바뀌었으며, 1896 년에 이르러서는 10호 1통으로 하는 십호작통제로 변경되었다.

당시는 지금의 수산2리와 황무손이까지 한 부락으로 수산리 경민 장의 관할하에 두었으며 지금의 수산 1리는 2리의 1호를 포함하여 22개 통, 2리는 4개 통, 황무손이는 2리의 1호를 포함하여 6호로 1통을 이루어 27개통이었다. 통호는 지금의 본적지 번지와 같이 고정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정의군에서 정의면으로 개칭되고 구 장제로 변경되었으며, 1933년에는 성산면으로 개칭되었다. 이 때 부터 황무손이는 해안 부락으로 이주해 갔다. 이 시기에 수산2리 는 조합장제로 구장이 관할하에 두어 운영하여 오다가 해방 후인 1948년도에 통반으로 개편되었으며 동년 11월 21일 4.3사건으로 수산 1,2리는 고성, 오조, 신양 등 인근 부락으로 소개되었고, 2리는 완전히 소탕되었다가 동년 12월 1일 1, 2리 모두 수산 1리 로 복구했다.

그후 2리는 행정 당국의 지원과 수산리 등 인근 부락의 협조로 1954년도에야 복구되었다. 1956년도에 지방자치제하에서 면 조 례에 따라 수산2리로 행정구역이 분할되었다. 1958년도에는 반 을 방으로 개편하면서 자연 부락 단위로 동문 동네를 청룡방, 섯동네를 백호방, 천외동을 주작방, 큰동네를 현무방, 서문동 네를 중앙방으로 5개 방을 두었다가 1962년에 1개반을 10여 호 단위로 하여 24개 반으로 재편성되었다.

1976년 4월 19일 새마을 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8개 반으로 개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 산 2리의 경우 1933년까지는 수산리에 속하여 조합장이 마을 을 통괄해왔다. 1939년에 공회당이 세워지고 가구수가 많아짐에 따라 1939년 수산 2구로 행정 업무가 분리되었다. 이 때부터 구 장을 두게 되었으나, 8.15광복을 맞으며 군정기간에 계속되다 1948년 11월 18일 마을 소개령이 내려 소개되었다가 12월 1일 1리와 함께 1리로 복구되었다.

1954년 5월 마을 복구 사업이 이루어져 2년 동안 수산 1구에서 행정 업무를 맡다가 1956년에 와서야 면사무소에서는 수산 2리로 이명을 바꾸어 행정 업무를 취급하기 시작했다.

1957년 면의회에서 조례안이 의결되어 지방자치법이 정하는바에 따라 수산 2리가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설촌유래 와 良水의 亂

수산리라는 이명은 고지의 기록이나 구전으로 전해지는 바로는 원래 首山(수산)으로 명명되었다. 그러나 부락이 커지면서 인구 가 늘어나고 학숙당이 설립되었으며, 향교 출입자가 많아지면서 인재가 많이 배출되어 양촌으로서의 입지가 굳어지게 되자, 首山 의 '首'는 '우두머리', '처음', '먼저', '머리' 등을 표현하는 반면에 '꾸벅거리다', '魁首自白(괴수자백)' 등의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양촌으로서의 양반, 선비가 사는 마을의 이름으로는 부적당하다고 해서 水山으로 개명하게 되었다.

그 개명의 경위는 '知人學塾 仁義禮智(지인학숙 인의예지)' 즉 '사람은 학문을 많이 배워 熟達(숙달)함으로써 仁義와 禮智를 안다'. 다시 말하면 어질고 인자하고 예의바르고 슬기로우며 신의 있는 사람이 仁者가 되고 知者가 된다는 말고 '仁者樂山, 智者樂水 (인자악산, 지자악수)에서 '水' 字와 '山' 字를 따서 水山里라 개명하였다고 한다. 이는 어느 부락명보다도 신선하고 고상하다 아니할 수 없다.

상고 시대의 탐라에 대한 탐라기년설에 의하면, 고.양.부 三乙那(삼을나)가 탐라국 당시,벽랑국의 사자가 삼신녀를 데리고 연화포(지금의 온평리)에 도착하자 삼을나가 연령순 으로 짝을 지어 부부가 되었다는 전설로 미루어, 이 고장에도 상고 시대부터 인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예종 2년(1168년) 11월에 토적 양수가 난을 일으켜 수령을 물리쳤는데, 수산리 경내에 "양수"라는 곳이 있어 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정도 가능하다. 고지에 의 하면 남서쪽 3km 지점의 수산평에 원나라가 본도를 지배할 당시 말 160필을 실어다가 방목하고 마장을 설치하여 목양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구전에 의하면 본리의 거동과 수산 2리 서쪽 "남다리" 와 남쪽 "통개나물" 등지에 취락이 형성 되었다가 생활 조건이 좋은 해안 가까이로 이주 하였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 지역에는 주거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방묘, 지석묘, 석기 들이 간혹 발견되기도 한다.

다음은 이를 뒷받침하는 태종록을 향토사학가 김봉옥이 발 췌해 설한 '군민총관부'의 목마장에 관한 기록인, 충렬왕 2년 (1276년) 칠월條(조)에 "招討司(초토사)를 군민총관부로 고치 고 탑라치를 다루가치로 삼아 보내었다. 그리고 말 160필을 가지고 와서 수산평(지금의 수산 남서쪽 3km 지점의 광활한 목장)에 방목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목마장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탐라는 광활한 초지와 따뜻한 기후에 맹수가 없기 때문에 말을 방목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그 후로 우마가 매우 번성하였으므로 아막(목마의 관리를 맡은 벼슬)을 두어 단사관 또는 만호로서 담당하게 하였다. 충렬왕 10년 2월에 군민총관부를 군민안무사로 고치고 동년6월 도리첩목아에게 400명의 군인을 주어 탐라를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동왕 12년(1286년) 5월에 몽고병 400명을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고려군 1,000명으로 탐라를 지키게 하였으며, 16년(1290년) 정월에는 반란군 합단, 원태조의 동생 합적온의 손자가 원세 조에게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만주로 도주하였다가 두만강을 건너 고려로 침입하자 탐라의 위수병 1,000명을 보내어 진압하게 하니 치악성과 충주 산성에서 격파하였다.

이 때에 탐라에 온 다루가치도 횡포가 심하였다. 탑라, 다루가치, 탑아치는 전라도까지 사냥을 나가는 바람에 백성 들이 동요하였다. 홀도탑아는 고려 조정에청자옹과 청자병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탐라에 온 다루가치는 고려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므로, 충렬왕 11년(1285년) 2월에 탐라의 다루가치를 불러 정전에서 향연을 베풀어 주었다. 또 학정이 심한 다루가치도 있어서 고려 조정을 통하여 원에 이르니 동왕 18년(1292년)에 우승과 아철이 탐라에 와서 다루가치 의 죄를 묻고 교지 곧, 지금의 월남으로 유배시켰다.

다음 耽羅誌의 기록을 보면 고려 충렬왕 3년(1227년) 원 에서 본도를 지배할 당시 (1273 - 1368)동서아막을 설치하 고 다루가치로 하여금 몽고 말 160필을 제주에서 감목케 하였는데, 동아막을 首山(수산)평에 설치하여 목양과 병참 기지로 삼았다고 한다. 충렬왕 25년(1300년) 동서도에다 10현을 설치했는데, 동도에는 조천, 별방(하도), 敦義(돈의), 首山에 두어 현감이 다스렸다. 그 때 원의 기왕후가 耽羅赤 (탐라적)으로 하여금 소, 말, 노새, 양, 나귀 등을 실어와 首山(수산)평에 방목하고 목자를 두어 감목하게 하였는데, 그 중에서 말이 크게 번성하여 산야에 가득하였으니 말을 명월포에서 원으로 반출하였다.

이러한 원이 탐라를 지ㅐ하면서 1276년에 말 등을 수산평 에서 방목할 당시 수산리에는 취락이 형성되고 연못 등이 시설되어 가축을 방목할 만한 여건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믿어지고, 수산 1,2리 인근 지역에 방묘, 지석묘 등이 산 재해 있으며 석기가 발견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상당한 古村(고촌)임에는 틀림이 없다.

삼 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문주와 2년(476년)에 탐라국의 方物(지방재산물)을 바쳤는데 왕이 기뻐하여 사자에게 은율의 벼슬을 주었다고 되어 있으며, 백제 동성왕(498년) 때는 탐라가 貢賦(공부, 조정에 바치는 물품)하지 아니하여 왕이 정벌군을 이끌고 무진주(지금의 광주)에 이르렀는데 탐라가 이 사실을 알고 사자를 보내어 사과하였으므로 중지 하였다고 되어있다. 따라서 탐라는 처음 백제에 속국이 되 었다가 백제가 멸망한 후, 신라에 귀속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도 탐라가 신라에 투항한 때가 문무왕(622년) 으로 되어 있는데 백제가 멸망한 2년 후인 것이다. 고려 태조가 삼국 통일 후 본토 전역을 장악하자 성주 고자견은 태조 21년(938년) 태자 末老(말로)를 入朝(입조) 시켰다. 이에 고려 대조는 이를 가납하여 종전에 사용하던 성주, 왕자직을 그대로 사용하여 자치를 허용하고 구당사, 즉 사무를 담당하는 관리를 파견하여 행정상의 연락만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무산계를 하사하여 남방을 방어케 하였다. 숙종 10년(1105)에 이르러 여정에서는 그때까지 사용하던 탐라라는 국호를 폐지하고 탐라군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직접 통지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탐색해 본 결과 탐라의 전성기는 400년대에 서 600년대로 추정해 볼 수 있으며, 당시 탐라의 지리적 여건으로 보아 수산리의 설촌 연대는 1,000여 년을 내다볼 수 있으나 확실한 연대를 확인 할 수는 없다. 구전으로 전하여지는 바로는 고씨, 문씨, 서씨, 임씨가 취락하여 살다가 水災, 旱災, 風災, 전염병(콜레라)등으로 대부분 사망하고 일부는 인근에 부락이 형성되면서 이주했다고 전하여진다. 현재도 큰동네 외곽지대에 高松伊圍園, 文武學童山, 林昌希圍園, 徐相熙圍園, 徐文昌이왓(밭)등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수산2리 역시 남도리(동백낭가름), 통개나물 등지에서 이주한 것으로 보아지며 鄭씨, 文씨, 丁씨, 伊씨가 설촌 했다고 전해지나, 설촌 후에 이들은 고잡에 정착하여 취 락을 이루어 농경과 수렵으로 생활했을 것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후 洪씨, 金씨, 鄭씨, 朴씨, 高씨, 吳씨등이 이주해 왔다고 하나, 이들은 생활 여건이 좋은 인근 부락이나 인척을 찾아 타처에서 이주한 것으로 보인 다. 또한 伊씨는 부인 田씨가 미인으로 소문이 났는데 하루는 물을 길러 갔다가 우물에 비친 자기 얼굴에 매료 되어 고개를 늘어뜨리다 실수하여 익사해 버렸다.

이에 이씨는 그 우물을 메워버리고 마을을 떠났다고 한 다. 그후 약 200년 전에 高씨, 吳씨,강씨, 양씨가 입촌하 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산 1리에는 500여년 전에 康씨 가 입촌했으며 그 후에 韓씨, 吳씨, 高씨, 金씨, 趙씨등이 입촌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수산리에서 서쪽으로 5km지점에 있는 '황무손이'라는 곳에는 약 150년전 金씨, 禹씨, 康씨, 蔡씨등이 설촌하여 살다가 50여년 전 김씨, 우씨 등은 구좌읍 종달리로 이주하고 강씨는 표선면 하천 리에 이주했다고 한다.

수산2리의 경우 약 220년 전에 제주 고씨 영곡공파와 26세손 고윤봉이 수산1리에서 이주해 와 정착하고 그 후 손들이 지금까지 마을의 주축이 되고 있다. 오씨는 세 곳에서 이주해 왔는데 약 190년 전인 1800년 경에 군위 오씨 11세손 (중말파)가 신풍리에서 이주해 왔고, 1830년 경에 군위오씨 12세손(중파)가 표선면 토산에서 이주해 왔으며, 서기 1870년 경에 군위 오씨 13세손인 오대행 3형제가 수산 1리에서 이주해 와 정착하였다. 강씨는 1810년 경 신천 강씨 설봉공파 14세손 강봉인이 오조리 에서 이주해 왔으며 양씨는 1890년 경에 제주 양씨 사직공계 17세손이 구좌읍 평대리에서 이주해 왔다.

良水의 亂

의종 22년(1168년) 수령과 관원들의 수탈과 횡포가 심하여 민원이 드높자 양수 등이 난을 일으켜 축출시킨 후 과거에 선정으로 신임을 얻었던 최척향 현령을 재 임 명해 주면 난군을 해산시키겠다고 버티니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여 최척향을 현령으로 보내니 난군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해산하여 난이 평정되었다고 한다.

사 학가 김태능의 '濟州論考' 중 '元이 탐라 지배와 목 마장' 에 나오는 '원은 자국민을 탐라에 이주시키기 위해 충렬왕 초에 3회에 걸쳐 본국에서 도둑과 범죄인 170여 명을 방치하여 거주하게 하였는데 이 사실은 점령 초에 제주민을 본토로 出陸시킨 것과 대조적이다'라는 기록과 '출렬왕 3년(1277년) 원은 몽고마 160필을 수산평에 방목 하고 다루가치로 하여금 이를 목양 관리하게 하였다.'는 기록을 연관시켜 고찰해 볼 때, 首山坪에 방목한 말을 관리하기 위해 본토민을 首山里에 정주시킨 것으로 추정 된다.

수 산리는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1,000여년 전에 속칭 남다리, 통개남물 및 지금의 臣洞(큰동네) 인근 지역에 고씨, 양씨, 서씨, 임씨 등이 살기 시작하여 점차 생활 여건이 좋은 현재의 수산 1리 및 2리에 정착하여 현재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1273년 삼벌초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제주에 처음 발을 디딘 원은 이 때부터 1세기 동안 제주를 지배하면서 1276년 말 양, 노새, 약대, 소 등을 방목하고 이를 관리하기 위해 동서아막을 설치할 당시 首山里에는 동아막(마소를 관리하는 곳)을 두었음 을 문헌과 전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탐라지 건치 연혁에 따르면 충렬왕 26년(1300년)에 제주도를 동서도로 나누고 현촌을 설치할 당시 수산리는 동도 토산현에 속했던 것으로 보이며, 태종 16년 도안무사 오식과 전 판관 장합 등이 사의에 따라 제주, 정의, 대정의 3읍으로 분립되어 수산리는 정의현에 예속 되었으며, 광해군 원년(1609년) 김치판관이 동서방리를 설치함에 따라 제주목에 좌면, 중면, 우면을, 정의현에 중면, 우면, 좌면을, 대정현에 우면, 좌면을 두었는데, 수산리는 좌면에 속했으며, 면에는 도약정, 약정, 직월 등을 두었다가 후에 풍헌, 약정, 농감을 두었다가 리에는 경민장, 동장, 기찰장을 두었다.

1910 년 8월 29일, 일본의 침략으로 1914년 제주, 정의, 대정 3군이 페합되고 전라도 제주군에 속함과 동시에 좌면이 정의면으로 개칭됨에 따라 수산리는 정의면 수산리 1,2구로 되었다가 1915년에는 도사제(島司制)실시 에 따라 전라남도 제주도 정의면 수산리 1,2구로 되었고, 구장을 두었으며, 1933년에 정의면이 성산면으로 개칭되어 성산면 수산리가 되었다.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자주 정부를 수립하지 못하고 대령을 사령관으로 미군 1개 연대가 진주하고 제주도 지역 미군정 청을 설치하여 스타우트 소령이 군정관이 되고 민간 행정을 담당할 도사에 김문희를 서리로 임명하여 군정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 러나 일제가 조선 독립을 억누르기 위해 제정 시행되었 던 법령을 제외한 일제 법령이 군정 당시에도 그대로 효력 을 갖게 되었다. 즉 행정상으로는 제주도가 전라남도에 소 속됨에 따라 지방자치제를 염원하는 도민들의 도승격운동을 추진하기 위하여 도승격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노력한 결과 10개월만에 군정 법령 94호(1946. 7.2 공시)로 濟州島를 전라남도에서 분리하여 道로서의 권한과 직무, 기능 및 직제를 구비한 道가 구성되었다. 도명을 濟州道로 하고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으로 나누고 1읍 12면을 관할하고 이를 1946년 8월 1일부터 시행하게 됨에 따라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면 수산1,2리가 되었으며 里에 이장을 두었다.

1980년 12월 1일 읍승격으로 성산읍 수산1,2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역대이장

역대이장
성 명 성 명
1 고 두 원 21 고 민 호
2 오 관 율 22 고 민 호
3 고 창 인 23 고 갑 권 
4 양 명 보 24 고갑권
5 오 남 관 25 오성익
6 강 승 호 26 오성환
7 오 남 관 27 고민호
8 고 대 선 28 양만길
9 오 윤 석 29 양만길
10 오 남 종 30 양만길
11 고 남 천 31 고대인
12 양 명 보 32 고대인
13 강 승 진 33 양만길
14 오 남 종 34 오동현
15 고 영 훈 35  
16 오 영 두 36  
17 오 성 옥 37  
18 고 성 관 38  
19 오 영 조 39  
20 강 평 관 40